오피니언 내생각은…

상업주의 판치는 철도역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3면

사소한 일에서 행복을 느낄 때가 있다. 이를테면 철도에 몸을 싣고 차창에 펼쳐지는 풍경을 바라볼 때나 포근하고 친밀한 느낌을 주는 철도역에 빠져들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철도역은 그동안 아련한 옛 추억을 서정적으로 회상케 하는 우리의 이웃이었다. 일상생활에 지친 도시민에게 철도역은 지친 영혼을 쉬게 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얼마 전 서울역과 영등포역을 마주했을 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은 더 이상 우리 마음속에 있던 철도역이 아니었다. 역 광장을 위협하듯 서있는 엄청난 건물들에다 무미건조한 백화점식 건물, 그리고 팍팍한 역 이미지에 질식하고 만 것이다.

역사 현대화라는 명분 속에서 주요 철도역들이 거대한 상업 위주의 시설로 변해버렸다. 도시민의 숨통을 터주던 역전 광장은 민자역사로 개발되기 전보다 훨씬 더 줄어 광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 역사 내에는 온갖 가게가 어지러이 널려 있어 승객들이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였다. 게다가 역 주변의 도로는 교통체증으로 거대한 주차장을 방불케 한다.

철도당국이 밀어붙이는 철도역 개발구상만 봐도 입이 벌어진다. 최근 철도공사는 용산역의 14만 평 공작창 자리를 재개발, 150층 초고층 건물에다 대형 백화점.할인매장 등의 고밀도 시설을 짓겠다며 민간 공모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런 초대형 복합단지가 건설될 때 주변 도시 경관과 교통체계에 미치는 악영향은 불보듯 뻔하다. 해당 지방자치단체의 도시환경과 인프라에 엄청난 부담을 가중시키게 된다. 용산역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서울시에 세워질 민자역사만 해도 건설 중인 왕십리역.창동역.청량리역, 개발될 노량진역 등 15개를 포함해 18개에 달한다. 이렇게 되면 해당 지자체의 도시 비전과 계획 등은 무시되고, 민자역사들이 서울시의 도시개발을 주도하는 커다란 모순을 낳을 수 있다. 철도역이 고밀도.고층의 상업시설 위주로만 개발되다 보니 해당 지자체들은 그동안 수립해 온 도시기본계획이나 공간구조계획과 상충되고, 도시 정비의 방향과 어긋난다고 불만이다.

반면 서구의 주요 도시들은 철도 역사를 박물관으로 개조하는 데 열심이다. 이들 도시에선 고속철 등 대체 교통수단 도입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기차역을 문화공간으로 활용한 사례가 많다. 프랑스의 오르세 미술관, 영국 브리스틀의 대영박물관, 독일 함부르크의 반호프 현대미술관 등이 철도역에서 문화적 활력이 넘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상업주의가 판치는 철도역사는 도시민의 삶의 향기가 묻어나지 않는 죽은 공간이나 다름없다. 이윤 추구를 위해 소비를 충동질하는 장소가 아니라 도시의 중심적인 공공 공간으로서 도시민의 정서를 담아내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해야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철도역의 역사와 전통 살리기 운동이라도 벌여야 한다. 철도역이 도시민과 함께 살아 숨쉬는 삶의 흔적을 살려내는 장소가 되길 기대해 본다.

원제무 한양대 도시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