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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백46돌 한글날 맞는 이기문교수(일요인터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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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나랏말ㅆ·ㅁ 갈고 닦아야죠”/독창·과학성은 세계서 이미 공인/사장된 말살리고 자체 개발해야
이기문교수(63·서울대)에겐 우리글·우리말을 빼면 그 어느것도 안중에 없다. 창제자 세종이래 한글이 열어놓은 국어의 세계를 톺아온지 40년. 지내온 길,또 목숨이 다할때까지 걸어야 할길을 한데 아울러 그는 선친의 뜻이 얹어준 숙명으로 받아들인다고 했다.
평북 정주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던 그의 선친은 그룬트비히·달가스 등이 부르짖던 덴마크식 농촌운동을 펴나가는게 꿈이었다. 그룬트비히목사의 삶과 생각을 혼신으로 받아들여 선친은 나라가 일어서려면 젊은이들에게 말과 역사를 바로 가르치고 그로써 꿋꿋이 얼을 간직하게 하는 방법밖엔 없다고 믿었다. 가형인 기백씨(69·한림대교수)와 그가 각각 나누어 두 학문의 길을 걷고 있으니 『지하에 계신 선친께서도 지금쯤은 당신의 뜻이 헛되지 않았음을 기뻐하시리라고 생각합니다』고 이 교수는 말한다.
오는 9일은 5백46돌을 맞는 한글날. 이 교수를 서울대 그의 연구실로 찾아가 마주앉았다.
­해마다 한글날을 맞으면 우리글·말연구를 필생의 업으로 삼고 계신 선생님 같은 분께선 남달리 느낌과 하고싶은 말씀이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근년 들어서는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신 세종대왕에게 전보다 훨씬 더 큰 경의와 흠모의 정을 느끼게 됩니다. 세종은 제가 학생들에게도 늘 강조하듯이 우리 민족·문화의 최대업적이랄 수 있는 한글을 누구의 도움도 받지않고 혼자 만들어낸 분입니다. 언어학의 대가였던 그분은 한민족의 문화적 저력이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가를 훈민정음창제를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한글이 그 독창성이나 과학성에서 세계 최고의 수준을 갖춘 문자라고들 합니다. 믿어도 되는 것인지요.
▲60년대초까지만해도 그런 주장을 하면 외국학자들로부터 「편협한 국수주의자」란 소리나 듣는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나 60년대 중반이후 서방 언어학자들의 한글연구가 본격화하고부터는 사정이 달라졌어요. 한글의 우수성이 그들의 검증을 거쳐 세계학계의 공인을 받기에 이른겁니다.
한글을 깊이 연구했거나 하고있는 대표적인 외국인학자로는 네덜란드 라이덴대의 프리츠 포스교수,미 컬럼비아대의 개리 레드야드교수,시카고대의 매콜리교수,영 리즈대의 샘슨교수 등을 들 수 있는데 한글의 우수성을 선양하는데 특별히 공헌한 학자가 뒤의 매콜리,샘슨 두분입니다.
샘슨교수는 85년에 낸 『문자체계(Writing Systems)』란 저서에서 한글을 특별히 독립된 한 장으로 다루면서 그것의 독창성과 과학성을 극찬하고 있습니다. 한글은 그때까지 전통적인 문자분류방식에 따라 음색문자로 규정돼 왔는데 사실은 음계라는 알파벳경지를 넘어 그보다 더 세분된 단위인 자질까지 지니고 있으므로 자질문자란 개념을 덧붙여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이 분이 이듬해인가 서울을 방문한적이 있는데 덕수궁안 세종대왕 동상앞에 가더니 넙죽 엎드려 큰 절을 올리는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매콜리교수도 해마다 한글날이면 강의마저 집어치우고 자기집에 학생들을 불러 파티를 엽니다. 『언어학자가 반드시 기념해야할 경사스러운 날』이라는 거지요.
­한글이 우수하다고는 하나 완선완미를 운위할 처지는 못되겠지요. 결점 혹은 단점을 든다면 어떤게 있습니까.
▲세종대왕때만해도 글자를 크게 썼기때문에 지금같은 깨알글자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한글을 깨알같이 붙여쓸 경우 자형의 문제로 종종 오독이 발생할 수 있다는건 사소하지만 명백한 단점이라고 할 수 있어요. 「흥」을 「홍」이나 「훙」으로 읽게 되는 경우가 흔하지 않습니까.
자체에도 문제가 없지 않지요. 영어알파벳처럼 대문자·소문자·고딕·이탤릭체같은 자체구분이 없어 글자를 늘어놓았을때 시각적으로 너무 밋밋하고 단조로운 느낌을 받게 됩니다. 개발이 필요한데 물론 그 여지나 가능성은 널리 열려져 있다고 봐요.
­한글만을 써야 한다는 사람들과 한자를 가르쳐 한글·한자를 병용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여전히 갈려 싸우고 있는데 선생님께선 어느 입장이신지요.
▲한글만을 써야한다는 이른바 한글전용론에 저는 동의할 수가 없습니다. 한글 전용론자들은 병용론자들이 한문이 아니라 한자를 섞어쓰자고 주장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학문은 배우기가 어렵지만 한자 2천∼3천자 정도는 국민학생들에게 언어적 호기심을 자극할 수는 있을지언정 절대로 부담이 되지 않아요.
일본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일본의 문자생활처럼 불합리한 예도 찾기가 힘들지요. 그러나 그들은 배움의 과정에서 자기네 가나(가명)만이 아닌 한자를 함께 배워 개념해석이나 사고력을 키우고 그렇게 갖춘 논리로 오늘과 같은 학문발전의 기초를 이룩해 낼 수 있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언어는 그 순수성만을 지키는 데 그쳐선 안되며 기능을 극대화시켜야 비로소 의미가 있는게 아닌가 합니다.
­오랜 분단으로 말미암아 남북간 언어의 이질화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와 있다고 듣고 있습니다.
▲통일을 전제할때 지극히 우려할 현상이지요. 그러나 다행히 해방전 조선어학회가 맞춤법이니 표준말 등을 미리 정해놓았던 탓에 우리민족은 해방직후의 극심한 혼란속에서도 우리말·우리글을 가르치고 배우는데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국어에 관한한 남과 북이 확고한 공통기반위에서 출발했다는 얘기죠.
분단기간중 북한측에서 글과 말을 많이 고쳤다지만 양쪽이 순수한 우리말 찾기에 힘을 기울이고 접근이 가능한 부분들을 함께 고쳐 간다면 이질화를 해소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는 않으리라고 봅니다.<정교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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