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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평안으로 그리고 나눔으로, 그녀의 430일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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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김점자씨. 처음엔 밤마다 울며 신을 원망했다. 억울했다. 잔인했다.남편과 두 아들을 돌보느라 자신을 위해선 동전 한 푼 써본 기억이 없는데,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는데….

#1. 프롤로그 : 첫 만남
2006년 3월 중순
말기암 환자 “황홀”을 말하다

 

‘천원짜리 인생’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무거운 시장바구니를 들고 아이를 업었으면서도 버스비 몇 백원을 아끼려고 먼 길을 걸어가던 주부의 삶이었다. 김점자. 서울 상계동 수락산 자락에 사는, 경찰공무원을 퇴직한 남편과 두 아들, 애완견 하나를 가족으로 둔 올해 55세의 주부. 2006년 3월 그를 처음 만났다. 당시 보름 전에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엿볼 수 없었다. 누구보다 크게 웃었고 누구와도 밝게 대화를 나눴다. 준비하고 떠날 수 있어 다행이라고, 남은 동안은 ‘이천원짜리 인생’으로 살다 가고 싶노라고.
한 호스피스의 소개로 연명치료를 접고 편안한 마음으로 생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 김점자씨를 알게 됐다. 그리고 430여 일간 김씨가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지켜봤다. 저명한 정신의학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임종자들을 관찰해 ‘죽음에 이르는 심리 5단계’를 찾아냈다. 거부와 부정-분노-타협-절망과 우울-수용이 그것이다. 김씨도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다만 다른 점은 그에겐 수용 이후의 6단계, ‘이타적 삶’으로 자신의 존엄을 높이는 승화의 단계가 더 있다는 것이다. 암 세포가 몸통을 점령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그는 차분히 자신을 정리하고 시신 기증 서약까지 했다.
 
인생의 끝이 예고된 사람을 만나는 일. ‘웃어도 될까. 동정하는 마음이 알게 모르게 드러나 상처를 주면 어쩌지. 죽음이라는 단어는 안 쓰는 게 좋겠지.’
김씨를 만나기 전 이런저런 걱정에 휩싸였다. 서울 남산 자락의 모현 호스피스를 향해 걷는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그를 만나는 순간 걱정은 날아갔다. 그는 아들을 대하는 어머니처럼 따뜻한 미소로 맞아주었다. 굳은 표정의 기자와 서로 간단한 자기 소개를 한 뒤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단어는 뜻밖에도 ‘황홀’이었다.
“기자님은 황홀한 거 경험해 보셨어요? 저는 여기(호스피스) 와서 그걸 느껴요. 이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황홀’이라니, 잘못 들은 것은 아닐까. 아니었다. 이어서 나온 단어가 ‘감사’였기 때문이다.
“통증이 있는데 약(몰핀)은 안 먹어요.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진통제나 마찬가지거든요.”
대화가 이어지면서 수다쟁이 아주머니의 거침없는 말 속에 빠져들었다. 편안하고 유쾌했다. 황홀을 이해할 듯했다. 자연스럽게 박장대소도 나왔다.
요즘 아들과 서울 근교로 꽃 구경을 다닌다는 이야기를 하던 그가 갑자기 먼저 묻는다.
“기자님 죽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당황해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어색해 묻지 못한 맘을 알아서 대신 물어준 것일까. 금세 그가 내린 결론을 들려준다.
“축복이지요.”
‘축복’이라는 단어에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궁금증도 커졌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초연하게 만들었을까. 혹시 내가 죽음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닐까.
세상과 이별이 예고된 사람들은 모두 저럴까. 그와 첫만남 후 써놓은 취재수첩에는 물음표가 넘쳐났다.
 
#2. 벚꽃 날리던 날에 대한 회상
시한부 선고 한 달 뒤
수락산 인근 김점자씨의 집

 

서울 남산 모현 호스피스를 찾은 김점자씨가 아로마 치료를 하고 있다.

“오늘 메주 건지려고 그랬는데, 손님 오신다고 집을 대충 치웠어요.” 베란다에 놓인 항아리를 가리키며 김씨는 기자를 맞이했다.
“사 먹는 거 못 먹겠어요. 너무 달달해서, 건져가지고 콩 삶은 것을 섞어놔야 맛있거든요. 아프다고 아무것도 안 하면 삶을 포기하는 거 같아서….”
대화가 익어갈 무렵, 발병(發病) 과정을 물었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듯,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당시의 상황을 들려줬다.
 
2004년 3월 말, 위가 안 좋은 거 같아 난생 처음, 그것도 우연한 기회에 내시경 검사를 받았던 동네병원. 그는 검사 결과를 설명해줄 의사의 진료실 앞에 앉아 기다리고 있다가 문틈으로 대화를 엿들었다.
“이야기를 해야 될까. 너무 커, 너무 늦었어.”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문틈으로 들려오는 의사들의 이야기는 분명 자신의 검사 결과를 놓고 하는 것이었다. 뭐가 잘못된 걸까. 설마 내 얘기는 아니겠지. 진료실에서 나오는 의사를 보고 점자씨는 벌떡 일어났다.
“선생님, 저 암인가요.” 멈칫하던 의사는 어색하게 어깨를 두드렸다.
“글쎄, 비슷한 거예요. 큰 병원에 가보세요.”
병원을 나서는 길. 구름 위를 걷는 듯 다리가 땅에 닿지 않는 것 같다. 철을 맞아 하얀 벚꽃 잎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들어설 때만 해도 화사함에 눈이 부셨는데…. 이제는 엷어진 자신의 생명을 보는 것 같았다. 잔인했다. 벚꽃도, 세상도. 믿을 수 없었다. 오진일 거라고 기대했다. 곧바로 찾아간 종합병원. 기대는 더 큰 충격과 절망을 가져왔다. 부신암. “희귀한 병인데, 벌써 3기말이에요. 수술을 해야겠습니다.”
번쩍이는 수술대 불빛이 마취에 어렴풋해지는 것을 느끼며 과거를 파노라마처럼 떠올렸다. 30여 년을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로 보냈다. 자신을 위해서는 동전 한 푼 써본 기억이 없다. 남편이 해직 상태였던 10년은 삯바느질ㆍ식당일 닥치는 대로 돈을 벌었다. 오죽하면 친구들이 ‘천원짜리 인생’이라는 별명을 지어줬을까. 원망스러웠다. 화가 났다. 누구에게든 화가 났다. 신도, 남편도, 암덩어리도, 그리고 바보같이 살아온 자신도 모두 미웠다.
‘안돼요! 아직 저를 데려가시면 안돼요. 그렇게 악착같이 살았는데 결과가 겨우 이건가요!’

# 3. 연명치료를 접고 평화를 택하다
시한부 선고 한 달 반 뒤
김점자씨의 집

 

‘제가 죽을 때 저버리지 마옵소서’ 김점 자씨가 서울 상계동 수락성당을 찾아 기도하고 있다(위). “갈매기야 이리와!” 인천 무의도로 가는 배에서 김점자씨는 갈매기와 함께 창공을 날고 있었다(가운데). 딸과도 같은 강아지 ‘재롱이’를 안고 있다(아래).

의사가 “최선을 다하겠지만 소생 가능성이 작다”고 말할 때 환자들은 어떻게 처신할까. 실낱같은 희망을 찾아 끝까지 기계와 약물에 의존해 버티고, 또 버티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연명치료를 접었다. 자신의 목숨을 두고 어떻게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는 걸까. 발병 이후의 치료 과정을 물어봤다.
수술 후 이어진 항암치료는 엄청난 고통이었다고 했다. 항암제를 먹고 나면 약효가 나타날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다. 독한 약에 시야가 뿌옇고 어지럽다. 매일 만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렸다. 남편과 아들을 구분하지 못했다. 암세포는 폐와 간으로 퍼져나갔다. 심한 우울에 빠져들었다. 밤마다 혼자 이불 속에서 울었다. 어디서 그런 물이 나왔는지 마신 물보다 더 많은 물이 눈에서 흘러 나왔다. 잠들기 전 고통이 심하자 기도했다. “주님,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게 해주세요. 그냥 조용히 갈 수 있도록, 고통 없이 사라질 수 있도록….”
항암치료를 중단한 건 시한부 선고를 받은 직후다. 사실 ‘선고’도 의사가 말한 게 아니었다. 그가 의사에게 캐물었다. “얼마 남았느냐”고 계속 물으니까 “6개월”이라고 말해준 것이다.
“스스로 항암치료 그만하겠다고 했어요. 의사가 딴 거 한번 더 써보자고 하는데 내가 거부했지요. 사실 가족이나 의사는 그만, 치료를 중단하라는 얘길 못하죠.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항암제가 몸에 안 듣는다는 것을 알겠더라구요. 그때부터 낫겠다는 생각을 버렸어요. 어떤 약을 써도 암세포가 그냥 커지기만 하고….”
항암치료를 계속하면 임종 직전까지 사람 구실은 못하고 발버둥치다가 이별할 것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추한 모습만 가족들에게 보이면서. 이제 말기 암을 친구로 받아들이고 평화를 택할 때가 됐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기도를 했다.
 
#4. 이별을 준비하는 바다
시한부 선고 두 달 뒤
서해안 무의도 백사장

 
파랗게 맑은 날, 자매가 오랜만에 여행을 떠났다. 파도는 밀려왔다가 한순간에 멀어져 갔다. 다섯 살 아래 동생 수산나가 다가와 점자씨의 팔짱을 낀다.
“언니랑 이렇게 사람이 없는 바다는 처음이지.”
“처음이지. 또 마지막일 수도 있는 거고.”
“언니,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마.” 수산나의 목소리가 단호하다.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밀려드는 파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점자씨는 말을 이었다. “나는 그래,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는 거. 그런 마음으로 남은 날을 사는 거야. 걱정마. 이렇게 마음이 편안한 걸.”
울컥해오는 가슴을 누르며 수산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해보면 언닌 어릴 적부터 참 감성적이었어. 시를 참 좋아했잖아. 늘 노트에 가득 적어놓고 외우고.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있어?”
점자씨는 자신 있다는 듯 낭송을 시작했다.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그냥 갈까/그래도/다시 더 한 번/저 산에도 가마귀, 들에 가마귀/서산에는 해 진다고/지저귑니다.”
김소월의 ‘가는 길’이었다. 이 시에 대한 백과사전 해석은 이렇다.「그리움이란 긴 이별을 인정한 후에야 가능한 말이다. 그래서 망설이는 나그네에게 까마귀는 갈 길을 재촉한다. 나그네의 복잡한 심사를 알 리 없는 강물은 어서 따라 오라며 제 갈 길만 무심히 간다」 끝없이 밀려왔다 다시 가는 파도. 점자씨는 한 소절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그냥 갈까, 그래도 다시 더 한 번.”
 
바다와 동생이 주는 감정적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지금까지와는 달리 우울해하는 그에게 기자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돌아오는 배에서 먹이를 받아먹겠다며 몰려드는 갈매기를 보자 그는 웃음과 활기를 되찾았다.
“기자님, 저는 지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요. 어떻게 없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언제부턴가 없어졌어요.”
그가 웃는 얼굴로 ‘죽음’이라는 단어를 말하는 것에 대해 이제는 주변의 누구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내가 정말 암인가, 수술한 건가. 혼란스러웠죠. 그러다 찢어진 배를 보고 생각했답니다. 이 암 덩어리를 어떻게 하지, 속을 다 갈라서 다 떼낸다고 없어지나. 그래 그냥 같이 가자. 같이 떠나자. 내가 가야 너도 가지. 언제인지 모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마음을 비우게 됐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었다. 누구나 생에는 끝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그것은 항상 남의 일처럼, 나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처럼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애초에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한마디를 덧붙인다. “제가 왜 감사하다고 하는지 아세요?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잖아요.”
 
#5. 시신까지 기증, 하지만 정리 못하는 것
시한부 선고 석 달 뒤
모현 호스피스

 

그는 여러 번 “준비가 다 됐다”고 했다. 생의 마지막에 대한 준비, 그것에 대해 묻자 점자씨는 “우리 재롱이(10년 넘게 같이 살아온 강아지)에 대한 것도 준비했죠. 제가 돌봐왔는데 제가 없으면…재롱이 봐주는 사람에게 제가 지금까지 모은 돈 300만원 준다고 공표해 놨죠”라며 웃는다. 그는 또 “아이들 음력 생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 수첩에 다 적어놓고”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가장 큰 것으로 ‘시신기증’을 꼽았다. 그리고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신은 뭐 좋은 일 있다고 만날 웃고 다녀!”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이고 남편 광혁씨는 문을 쾅 닫았다. 죽음에 초연한 아내에게 오히려 화를 냈다.
점자씨가 도장을 찍어달라며 시신기증 서류를 내밀었을 때, 남편은 “꼭 해야 해? 뭐가 급해”라고 소리지르며 서류를 밀어버렸다. 나중에 남편이 고집을 꺾었고 보호자 동의란에는 도장이 찍혔다. 하지만 남편은 영 못마땅해했다.
부부는 살아오는 동안 참 많이 싸웠다. 가장 미워했지만 가장 걱정되는 사람이다. 아들들은 점자씨의 뜻을 받아들여줬다. 이제 남은 앙금은 남편과의 관계뿐이다.
“또 술 마셨어? 나는 이렇지만, 당신은 건강해야지. 나는 준비됐는데 당신은 왜 미련을 못 버려.”
“어떻게 그렇게 죽음에 당당할 수 있어. 어디, 진짜 죽을 때도 그런지 내가 지켜볼 거야. 알겠어.”
뭐라고 맞받아치려다가 점자씨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가 아픈 뒤 남편은 성당 다니기를 끊었다. 대신 술이 늘었다. ‘따뜻하게 대해야지’ 하다가도 그런 남편을 보면 화가 났다.
“옛날 어른들 말씀이 그 병은 화병이라고. 누구한테 그렇게 스트레스를 받았느냐고 묻기도 했죠. 그런 말 들으면 저희 집 아저씨가 ‘내가 죄인이다. 내가 죄인이다’ 자꾸 그래요. 그런 직업(경찰)이 그렇잖아요. 늦게 들어오고.”
그랬다. 그가 준비 안 된 것이 하나 있었다. 남편과의 화해다. 그는 아픈 자신을 두고 술을 먹는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떤 때는 입으로는 용서가 돼도 저도 인간이기 때문에, 신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에는 그런 앙금이 있잖아요.”
남편은 오늘도 수락산에 갔다고 했다. “우리 아저씨 또 울러 갔을 거야. 고정석이 있어. 계곡의 바위. 눈물바위.”
“남편도 저를 위해서 상황버섯 같은 거, 많이 해왔는데 제가 (그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저는 그게 약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입에 들어가지 않더라고요.”
 
(계속)
절망에서 평안으로 그리고 나눔으로, 그녀의 430일②

글 민동기 기자
사진 변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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