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적포기 공명선거 기회삼자(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민자당을 떠나고 선거관리 중립내각을 구성하겠다는 노 대통령의 선언은 이 시기의 나라상황에 큰 변화를 가져올 획기적 결단이라 할만하다. 임기말의 대통령이 초당적 입장에서 공정한 선거관리를 맡기 위해 집권당을 탈당한다는 것은 우리 당정사에 처음있는 일이며,그런 결단이 나온 배경이 어떻든간에 이를 잘 살려 나간다면 공명선거로 가는 큰 발걸음이 될 수도 있고 앞으로 귀중한 전례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이번 결단은 또 단체장선거와 관권부정선거 문제로 헝클어진 정국을 정상화시킬 수 있는 큰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앞으로 정계구도와 정부­정당관계에도 큰 변화가 예상되고 각 정당의 대선전략에도 수정이 불가피할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이 암담한 정치현실에서 이런 변화의 계기가 마련된 사실 자체를 환영하면서도 이 계기를 긍정적으로 살려 나갈 수 있을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마음놓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본다.
우선 노 대통령의 이런 결단이 나온 배경을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집권세력 내부에 심각한 알력과 분열현상이 있는 것 같고 남은 임기중 나라중심이 더욱 흔들릴 것 같아 걱정된다. 김영삼씨의 민자당총재 취임이후 노 대통령의 무력화 현상은 급속도로 진행돼왔다. 개각 추진방침을 밝히는 기자회견에서 김 총재는 대통령 권한사항을 단정적으로 언급했고,노 대통령의 이번 결심이 나온 배경에는 이런 불편한 당과의 관계가 있지 않나 짐작된다. 임기말의 당정이 같은 배를 타고 있어도 나라중심이 안잡혔는데 이제 공식분리 관계에 들어서면 어떤 현상이 벌어질지 걱정이다.
또 한가지 우려는 각 정당 협의에 의한 중립내각이 과연 제대로 구성되겠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 정당들의 오랜 생리는 타협의 저능아라는 사실인데 내각구성이란 민감한 이해가 걸린 큰 덩어리를 놓고 과연 타협을 이뤄낼 것인가. 결과적으로 한 쪽이 승복않는 내각이 돼버릴 경우 모처럼의 대통령결단의 의미는 퇴색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대통령의 탈당으로 중앙차원의 당·정고리는 끊어진다고 하지만 관료집단과 여당조직의 오랜 유착체질로 보아 하급단위의 「중립행정」이 단기간에 확립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앞으로 대통령이하 새 내각이 이 대목에 민감하게 신경을 쓰지 않으면 공정한 선거관리라는 취지는 살리기 어렵다.
이런 몇가지 우려되는 대목만 보아도 대통령의 결단을 취지대로 살릴 수 있느냐의 여부는 대통령 자신과 각 정당이 하기에 달려 있다. 당장 민자당으로서는 이른바 「여당 프리미엄」을 사실상 미련없이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행정부로부터 나오는 인적·물적 지원과 정책·정보차원의 모든 지원이 있어서는 안된다.
야당들도 이제는 정치방식을 바꿔야 할 것이다. 그동안 집요하게 요구해온 단체장선거도 대선공정성 보장때문에 했던 것인 만큼 대통령의 당적이탈과 중립내각이란 격은의 공정보장장치를 살려나가면서 국회정상화·내각구성협의에 적극 응하는 것이 좋겠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