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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박지만의 회상 ″차 실장이 내 행동 옭아맸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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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누구나 유년기를 지나 사춘기가 되면 자신의 인생행로를 구체적으로 모색해 보고자 한다.
본격적인 성년기를 맞아 세상의 거센 파도를 자기 힘으로 헤쳐나가다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세파에 찌들기도 하기 이전, 그 황금빛 사춘기에는 하얀 종이 위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듯 자기만의 생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설계해 보게 된다. 당연히 꿈과 패기·치기가 한데 뒤섞인 어설픈 그림일 수밖에 없지만 그 과정에서 한 개인의 자아는 부모의 품에서 벗어나 서서히 독립한다. 부모를 자신과 대등한 인간으로 여길 수 있게되고, 때로는 그들이 노출한 인간적인 약점들을 이해하면서 슬그머니 감싸주는 어른스러움도 발휘할 수 있게된다. 평범한 부모에 평범한 자식간이라면.
그러나 박지만의 경우는 달랐다. 박정희 대통령의 그림자가 너무 컸다.

<기관끼리 보고경쟁>
마땅히 자신의 몫이어야 할 자기 인생의 서문은 박 대통령이라는 거목이 이미 앞서 써놓은 모양이 됐다.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점이 명예보다「멍에」로 더 많이 작용했다. 박 대통령은 세습군주가 아니었고 따라서 박지만씨도 차기권력이 예비 된 왕세자가 아니었으며, 세상인심은 절대권력이 몰락한 순간부터 지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어릴 때 장래 희망은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어요. 지금도 간단한 VTR수리 같은 것은 할 수 있을 정도의 취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면서 청와대생활 자체에 점점 압박감이 느껴지기 시작했지요. 나는 이후락 비서실장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어요. 그저 아저씨라고 부르며 따랐을 뿐이었죠. 나와 권투장난을 많이 해주었던 박종규 경호실장님도 그냥「아저씨」였어요.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차츰 「왜 나만 자유롭지 못한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는 괴로웠어요. 늘 따라붙는 경호원도 싫었습니다. 내가 남을 해친 일이 없는데 왜들 극성인가 하는 생각이었지요』
박지만씨는 『내 행동이 일일이 보고되니까 매사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고교시절에는 오히려 반발심이 생겨 혼날 일을 일부러 보란 듯이 한 적도 있었다』 고 말했다.
중학교까지 매우 우수했던 학교성적은 고교시절부터 떨어지기 시작했다. 중앙고를 졸업할 때의 성적은 중간을 약간 웃도는 수준.
육군사관학교를 택한 동기에 대해 박씨는 『내가 결정한 일이었고 아버님도 내 생각을 대견해 하셨다』 고 말했다. 자식들의 진로문제만큼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일임하는 게 박대통령의 방침이었다는 설명이다.『육사에 지원할 때부터 나는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보낼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고3때 미국의 웨스트포인트나 프랑스의 에콜 폴리테크닉에 대해 알고 동경하게 되었지요. 사관학교졸업 후 일정기간을 복무한 뒤 사회에 나와도 나름대로 국가에 기여할 길이 있다고 생각해서 아버님께도 그런 말씀을 드렸었어요. 그리고…솔직히 말해 청와대를 떠나 독립된 생활을 해보고 싶은 욕구도 강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멍에는 그가 청와대를 떠났다고 해서 벗겨질리 없었다. 박지만 생도에 대한 이른바 「정보보고」가 군·중앙정보부·청와대비서실·경호실 등 각 기관을 통해 박 대통령에게 지속적으로 전달되었다. 이들 권력기관의 생리상 대통령의 아들에 대한 신상보고는 극도로 민감한 사안에 속했고, 따라서 기관간의 경쟁의식도 매우 치열했던 흔적이 많다. 이 과정에서 박지만씨에 대한 교육적인 배려는 애당초 기대할 수 없었다. 오직 최고권력자의 으뜸가는 관심사에 관해 누가 더 정확하고 많은 정보를 올려 정보수집 능력을 인정받느냐 만이 관건이었다. 더러는 뻥튀기 한 정보들도 대통령의 집무실 책상에 그대로 올라갔다.

<″감시당한다〃불안>
1977년 육사입학 (37기)부터 79년 10·26사건까지 벌어진 「보고경쟁」 에서 승리자는 역시 차지철 경호실장이었다. 이 기간은 차지철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그는 대통령과 지만 생도가 부자관계라는 측면을 거의 무시하고 한 명은 「보고드릴 상급자」로, 다른 한 명은 「정보수집대상」으로만 파악했던 듯하다. 당연히 『하루종일 감시당하고 있다』거나 박대통령의 꾸중을 듣고 『또 차에게 당했다』 고 짐작하게 되는 피해의식 속에서 박지만 생도 의 울분은 점점 엇나간 방향으로 출구를 찾게 됐다는 해석이 가능한 대목이다.
박씨의 계속되는 회고 .
『지금 생각하면 쑥스럽지만…그 즈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청와대 경호실에 근무하던 한 여직원과 친해졌어요. 서로 순수한 마음으로 가끔 시내에서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고… 그 나이에 흔히 있는 평범한 사귐이었는데 주변에서 알게 되었지요. 아버님께서 저를 불러「아직 이른 나이니 앞으로는 만나지 말아라」고 하셨어요. 그 애는 결국 나 때문에 청와대 근무를 그만두었습니다. 만날 수는 없었지만 대신 나는 그 애와 전화로 이런저런 대화를 했어요. 「아버님은 나보고 만나지 말라 시지만 나는 너와 계속 친구로 남고 싶다」 는 말도 하고요. 그런데 차 실장이 그 통화내용을 몽땅 도청하고 녹음해 아버님 앞에서 녹음기를 틀었어요. 아버님께서는 녹음내용을 들으면서 스스로 부끄러워하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당시 차 실장은 충성하느라 그랬겠지만, 나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이후 10·26때까지 나는 차 실장과는 말도 하지 않고 지냈습니다』
이와 비슷한 유형의 일화를 기억하는 전 청와대 경호관 L씨의 증언. ,
『차 실장이 깊은 배려 없이 지나치게 맹목적으로 행동한 게 사실입니다. 지만군이 고교동창들과 어울려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나니까 하루는 그 동창생 7∼8명을 전부 연행하다시피 경호실로 데려왔어요. 모모한 기업체 사장아들에 전직고위공직자 아들도 끼여있었습니다. 차 실장은 「너희들 앞으로 또 지만영식과 같이 다니면 혼날 줄 알아라」고 윽박질러 겁을 주었지요. 그 아이들이 집에 가 사연을 얘기했을 테니 경호실장의 위세를 아는 부모들은 아마 기절초풍했을 테지요. 그렇치만 차 실장식의 훈육스타일이 스무 살 안팎의 청년들에게 제대로 먹혀들었겠습니까. 특히 지만군의 입장에서 친구들의 전화가 뚝 끊기고 자기가 전화해도 잘 바꿔 주지 않으니 사연을 알아보았을 것이고, 「또 이 사람이 장난쳤구나」하는 생각에 분이 더 났겠지요』

<업소입수 수표 추적>
역시 경호원출신인 H씨는 박지만 생도에 대한 정보가 청와대경호실-중앙정보부, 즉 차지철 실장-김재규 부장간의 세력다툼에 이용된 사례를 들었다.
그의 기억.
『차 실장이 한번은 지만군이 시내 업소에서 사용한 5만원 짜리 수표를 입수했습니다. 박대통령께 즉각 보고됐지요. 대통령께서 노발대발했어요. 도대체 누가 준 수표인지 알아내라는 지시가 당연히 떨어졌고요. 차 실장은 다시 각하의 지시내용과 함께 그 수표를 김재규 정보부장에게 전달했습니다. 김 부장의 반응이야 뻔한 것 아닙니까. 속된 말로 「물」 을 먹은 데다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으니 심기가 아주 불편했겠지요』
그렇다면 수표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당사자인 박씨는『철없이 물정 모르고 경망 된 짓을 했었다』고 새삼 후회하면서도 솔직히 털어놓았다 『수표는 아버님 것이었습니다. 저야 물론 그 일로 아버님에게 호되게 혼쭐이 났지요. 아버님께서는 반면 비서실이나 경호실의 부하직원이 준 수표가 아니었다는 점에서는 적이 안심하시는 눈치였습니다. 수표가 경호실과 정보부를 오간 사연은 나로서는 알 도리가 없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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