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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아진 취업문 고학력도 안심못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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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일자리는 얼마나 되고 내가 갈 수 있는 직장은 과연 어디일까』 매년 가을이면 취업 예비생들을 열병처럼 들뜨게 하는 이같은 궁금증에 대해 올해 역시 속시원한 대답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싶다. 이른바 명문대학 일부 인기학과 출신자들이 인턴사원이나 특별채용 형식으로 이미 입도선매된 경우를 뺀다면 대부분의「평범한」취업 희망자들은 올해도 여러 직장의 문턱을 분주히 드나들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보인다.
취업 문턱이 높다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그러나 올해가 그 어느 때보다 취업이 어려운 해가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기업 인사 담당자· 대학취업보도창구·취업정보기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노동부 등 관련기관의 통계도 올해가 사상 최악의 취업 경쟁을 기록하는 해가 될 것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추천서의뢰 격감>
◇대졸 공채=많은 대기업들이 취업공고를 한달여 남긴 현재 시점에서조차 채용 규모를 속시원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채용 규모를 크게 줄이면 자칫 기업사정을 내놓고 인정하는 셈이 되고, 그렇다고 무작정 채용규모를 늘릴 수도 없는 실정에 놓여 있다.
현재까지 올 하반기 신규 채용을 마쳤거나 채용 예정인 10대 대기업그룹 중에서 채용 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힌 곳을 중심으로 살피더라도 작년 하반기 공채 때보다 채용 인원을 늘린 곳은 선경그룹뿐이다. 지난해 4백명에서 4백19명으로 늘려 잡았는데 이 수치 역시 지난 7월 인턴사원으로 뽑아 채용이 확실시되는 50명이 포함된 수치여서 공채 인원은 사실상 줄어든 셈이다.
지난해 하반기에 1천6백50명을 선발했던 럭키금성그룹은 올 가을에 인턴사원 2백명을 포함, 1천2백명선으로 채용을 줄였고 현대그룹도 3천명에서 5백명 준 2천5백명을 뽑을 계획이다.
한국화약그룹은 지난해 5백명에서 4백50여명, 롯데는 3백40명에서 3백명, 쌍용그룹은 5백명에서 3백50명으로 줄여 뽑을 계획이며 삼성·한진·기아그룹 등은 채용 규모를 확정짓지 못하고 있다
특히 작년 하반기에 현대와 함께 3천명 가까운 인원을 채용하는 등 국내에서 가장 많은 신규인력을 흡수해 온 삼성의 올 가을 채용수준에 큰 관심이 쏠리고 있지만 아무래도 줄어들 것이라는 게 업계의 대체적 시각이다.
금융기관·정부투자기관도 찬바람 불기는 마찬가지다.
매년 수십명에서 1백여명의 신규인력을 채용해 온 주요 은행·보험·증권사들도 신규채용을 바짝 죄고 있다. 금융시장 개방·금융 자율화 시대를 목전에 두고 감량 경영을 지속하고 있는 금융기관들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신규채용을 되도록 줄이고 사무자동화로 이를 메운다는 자연감소방침을 유지하는 곳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주요 제조업체들이 이공계·인문계 채용 비율을 예년대로 7대3 정도로 유지할 계획이어서 인문계 졸업생들이 웬만한 지명도의 직장을 들어가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예상이다. 취업 예비생이나 이들을 도울 입장에 있는 대학 취업 보도창구도 이 같은 긴축 채용의 한파를 절박하게 체감하고 있다.
속칭 비인기대학·비인기학과 등의 경우 말할 것도 없고 이른바 「알아주는」 대학의 경우도 예년보다 추천서 의뢰가 눈에 띄게 줄었다.
연세대 취업담당인 김농주과장은 『취업만은 자신 있었던 경영학과 등 상경계까지 작년보다 기업추전천가 10∼20%씩 줄었다』고 말했다.
노동부의 대졸(전문대졸 포함)실업률 통계도 올 가을 취업난의 심각성을 예고하고 있다.

<석사들 대거 몰려>
89년 이후 줄곧 감소해 온 대졸실업률(그림참조)은 올해를 고비로 상향곡선을 그리기 시작, 지난 6월말 현재 실업자 11만9천여명에 실업률 3·7%를 기록하고 있다.
노동부 관계자는 『지난 수년간 경기가 나쁜데도 불구, 경력사원보다 인건비가 훨씬 덜 드는 신입사원의 채용 규모를 대기업들이 크게 줄이지 않은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올해 상반기부터 경기 침체에 시달리는 업체들이 본격적인 신규 채용 삭감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이에 따라 대기업 공채 필기시험 날짜를 11월1일 한날에 치르도록 유도, 2중지원에 따른 응시기회 손실을 막도록 할 계획이다.
◇하향 지원 현상=취업문이 좁아지다 보니 대학입학시험에 나나타나던 하향 지원 현상이 직장 선택과정에서도 옮겨져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과거 고졸자가 택하던 직장에 대졸자가 몰려들고 대졸자가 가던 직장에 석사학위 소지자들이 원서를 내는 경우가 많아진 것이다. 대부분 고졸 학력자들이 응시하던 9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대졸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최근에는 연구소 일자리를 찾지 못한 석사학위자들이 일반 대기업 공채시험에 원서를 내는 경우가 많아졌다.
특히 80년대 중반이후 붐을 이루었던 미국경영학석사(MBA) 소지자들이 과거에 선호했던 외국계 은행이나 기업·증권사 연구소에 들어가지 못하고 근무조건이 나쁘다고 꺼리던 제조업체에 대거 몰려들고 있다.
지난 6월 인문계 20명 가량을 뽑은 현대자동차 상반기 공채 때 미국의 모 일류대학에서 MBA를 딴 2명을 비롯, 국내 일류대학석사들이 일반 사무직에 다수 지원해 업계인사담당자들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양한 채용방식 도입= 면접이나 적성·인성검사 등을 도입해 사람 됨됨이를 총체적으로 파악하려는 기업들의 노력이 두드러지고 있다.
면접시험도 한차례면 끝나던 것이 2중·3중으로 강하된 경우가 많으며 면접내용도 단순한 신상문제를 묻는 요식적 절차대신 전공분야의 깊이·가치관 등 전문지식 및 종합적 인식을 묻는 쪽으로 변화해 가고 있다.
필기시험도 상식문제의 경우 단순히 암기 위주에서 벗어나 주관식 논술문제가 보편화되고 있으며 어학시험도 말하고 듣는 능력이 어느 정도 갖추어져 있기를 요구하고 있다.
채용방법의 다양화는 뽑는 쪽에서 보면 자기 입맛에 꼭 맞는 인재를 구별해내는데 오차를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취직하고자 하는 쪽에선 이것 저것 많은 준비를 해야하므로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취업 장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 같은 다양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 대기업 채용방식의 자율화다. 대기업그룹의 경우 그룹인력관리위원회에서 모든 채용절차를 도맡아 일괄적으로 뽑은 뒤 계열사별로 인원을 분배하던 방식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
이제는 계열사별로 업종별 특성에 맞는 인력을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뽑을 수 있도록 재량권이 주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업계 관계자는『기업 규모가 커지고 경영환경이 전문화됨에 따라 계열사별 채용은 부득이한 대세며 자율경영을 유도하는 정부의지와도 마찰을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정기공채제 퇴색>
월간 리크루트 주원하편집장은『그룹공채제도는 그룹 유명세를 이용,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 그 외형은 상징적으로 존속되고 있지만 점차 1년 열두달 수시채용이 늘고 봄, 가을 두번 뽑는 정기 공채제도의 의미가 퇴색하는 추세』라고 말했다.
인턴사원제도가 전문인력을 미리 선발하기 위한 방편으로 변화해 가는 것도 이 같은 자율채용의 경향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수년전부터 도입되기 시작한 인턴사원제를 눈에 띄게 채택하고 있는 기업은 지난해 10여개에서 올해 20여개로 늘었지만 대우그룹처럼 신입사원 전체를 이 제도로 뽑는 곳은 한 군데도 없고 소수의 전문인력이나 명문대 출신을 미리 잡아놓기 위한 채용방식으로 굳어지고 있다.
올 상반기에 동아제약이 제약직종, 대홍기획이 광고관련학과 전공자들만을 상대로 소수 모집했으며 럭키금성·한국타이어·대한교육보험 등도 소수 인원을 채용하는데 그쳤다.
앞으로 일반 사무직·영업직은 공채로, 전문직은 추전을 통한 인턴사원제로 채용하는 2원적 패턴이 정착할 것으로 내다보는 사람도 있다.

<홍승일 기자>
중앙일보사 리크루트사 공동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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