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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경찰이 신뢰 회복하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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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 폭행 사건은 많은 교훈을 남겼다. 형사사법 체계와 경찰수사에 대한 불신, 실패한 로비, 수사기관의 부패 가능성, 외압에 의한 공권력의 추락, 경찰조직 내부의 불신과 분열, 퇴직 공직자의 윤리, 공직 임기제의 비일관성, 경찰 자정 능력의 한계, 조직의 수장이 갖춰야 할 덕목 등 여러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게 한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이택순 경찰청장에게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책임질 일이 있다.

우선은 일종의 단순 폭력사건 수사 과정이 외부 영향에 의해 심각하게 왜곡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경찰이 이 정도의 사건조차 말끔히 처리할 수 없는 수준인가 하는 불신을 초래했다. 그야말로 수사 역량의 부실함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사회적 이목을 끌 수 있는 중요 사건에 대한 정보 소통과 보고 체계의 문제점, 수사 절차가 부당하게 지연된 점, 이로 인한 공권력의 권위를 추락시켰다는 점에서 경찰조직의 최고 책임자로서 국민에게 잘못을 했다.

또 하나 수사를 지연시키거나 은폐시키려고 했던 경찰조직 내.외부의 관련자들에 대해 경찰 스스로 엄정하게 수사해 진실을 적극적으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 대신 감찰 수준의 중징계로 성급히 마무리하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함으로써 경찰 구성원들로부터 극심한 반발과 불신을 초래했다. 통상적으로 경찰의 모든 수사 결과는 검찰에 송치되기 때문에 굳이 수사 의뢰를 하지 않더라도 검찰은 사건 연루자들에 대해 철저하게 수사를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의 의견 제시를 불가피한 결정으로 받아들인 나머지 내부 구성원들에게서 "부하를 검찰에 팔아 먹었다"는 식의 극단적인 비판을 듣는 등 내홍에 시달리고 있다.

검찰과 경찰 간의 수사권 조정을 둘러싸고 15만 경찰 구성원의 염원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이로 인해 대다수 경찰관은 심각한 사기 저하와 자괴감을 느끼고 있다. 경찰의 사기 저하는 국민에게 고스란히 전가될 수 있다. 경찰 62년 역사상 처음으로 구성원들로부터 퇴진 압력을 받은 청장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심각한 리더십의 위기를 맞고 있다. 경치일(警恥日)이니, 경란(警亂)이니 하는 말이 공공연히 나올 지경이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통렬한 책임 인식은 전적으로 경찰청장 본인과 임명권자에 달려 있다.

이택순 경찰청장은 임명권자의 재신임을 계기로 조만간 조직 장악과 공직 기강 등을 앞세워 구성원들을 긴장시키고, 특단의 대책을 제시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그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조직 쇄신을 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바 있다.

그러나 "뼈를 깎는, 치부를 도려내는, 특단"과 같은 언어 인플레 현상에 국민은 식상해한다. 대국민 홍보용 대책을 졸속으로 마련하기보다 추락한 경찰조직의 명예를 회복하고, 저하된 구성원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우선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일선 현장 경찰관들만을 다그쳐선 안 된다. 권한을 가진 상급자들도 업무를 공정하게 처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등 실천 가능하고 지속성 있는 장기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

그동안 이택순 청장은 경찰의 염원인 수사권 독립 노력에 매우 소극적이었다는 내부 비판을 받아 왔다. 그러나 경찰의 수장이라면 수사권 독립이 궁극적으로 국민에게 유익하며, 형사사법체계의 선진화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어야 한다. 나아가 경찰의 수사 역량을 높이고, 내.외부의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직무의 공정성이 훼손되지 않도록 구체적인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경찰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수사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모쪼록 경찰 역사상 최악의 수치로 기록될 이번 사태를 계기로 경찰이 환골탈태(換骨奪胎)해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민중의 지팡이'로 다시 태어나길 기대한다.

임준태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