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殺)처분 실시한 사육농가 "자식 묻는 심정 … 가슴 미어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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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류독감이 전국으로 급속하게 확산하는 가운데 피해 농가들은 애써 기른 오리들을 집단 폐기하면서 망연자실하고 있다.

전국에서 오리를 가장 많이 생산해 온 전남 나주시는 오리육 가공업체의 부도가 겹치는 바람에 오리 사육 농가는 물론 지역경제마저 휘청거리고 있다. 그런가 하면 조류독감이 발견된 경주에서도 22일 오후부터 살처분이 시작됐다.

◆ "가슴이 미어져요"=22일 오후 3시 충남 천안시 직산읍 판정2리 박재윤(55)씨의 농장. 박씨는 자신이 6개월간 길러 온 오리들이 모두 살(殺)처분되는 광경을 지켜봐야 했다.

"가슴이 미어져요. 새벽 4시부터 아내 그리고 둘째 아들과 함께 셋이 하루 15시간씩 일하며 정성들여 길렀는데…"

이날 박씨의 오리 8천8백마리는 긴급 설치된 비닐하우스에서 이산화탄소 가스로 살처분돼 인근에 묻혔다. 박씨가 자신의 오리가 조류독감에 걸린 것을 안 것은 지난 21일 새벽. 밤새 낳은 오리알을 확인하러 사육장에 들어간 그는 깜짝 놀랐다. 보통 5천여개 되는 오리알이 절반도 안되는 데다 오리들이 털이 빠지고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박씨는 2001년 초 적자를 보던 거봉포도 과수원을 정리한 돈 7천만원에 농협에서 빌린 1억5천만원을 보태 오리 사육을 시작했다. 천안 H사에서 종오리와 사료를 공급받아 기르면서 오리알을 다시 H사에 납품해 왔다. 그런대로 재미를 봤고 올해 초엔 큰 아들(30)까지 오리 사육에 끌어 들였다.

8km 떨어진 석곡리에 있는 아들 농장의 오리들은 음성판정을 받았지만 한치 앞을 예상치 못하는 상황이다. 아들도 사료를 받아오는 등 매일 H사 오리농장을 트럭으로 드나들기 때문이다.

이날 오후 고건 국무총리와 허상만 농림부장관은 박씨의 농장을 찾아 피해상황을 둘러보고 피해 대책을 약속했으나 한 마리당 몇천원에 불과할 위로금으로는 재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매월 2천2백만원씩 드는 사료값만 다섯달 치가 밀려있고 몇달간 오리 사육이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 "엎친 데 덮친 '오리 쇼크'"=22일 전남 나주시 산포면 매성리. 2백여명의 공무원.군인.농민 등이 포크레인 등을 동원, 민모(58)씨 농장을 시작으로 오리 살처분에 나섰다.

마을은 생매장 당하는 오리 울음소리와 농민들의 한숨 소리가 섞여 온종일 뒤숭숭했다.

민씨 농장으로부터 반경 3㎞ 이내 오리농장 15곳의 12만여마리 중 4만여마리가 이날 폐기 매립했고 나머지는 23일 처리하기로 했다.

산포면 덕례리 박맹호(43)씨는 "40여일을 길러 출하를 앞둔 오리 5천5백여마리가 한 순간 땅속에 묻히고 말았다"고 밝혔다.

1백21농가가 1백37만7천마리를 사육해 오리 전국 최대 주산지로 발돋움한 나주시는 오리 도축 및 가공업체인 ㈜화인코리아마저 부도나는 바람에 '오리 쇼크'가 더욱 크다.

2만마리를 사육해 온 강모(59)씨는 "2001년 퇴직금 등 3억7천만원을 투자해 오리 농장을 시작했는데 오리고기 소비 부진 탓에 지난 5월 이후 지금까지 사육 대금 6천만원을 받지 못해 파산 직전"이라며 울상을 지었다.

연 매출 1천3백60억원의 화인코리아는 임직원이 4백여명이고 계열 농가와 협력업체 등을 포함하면 관련 근로자가 2천여명에 이르러 회사 부도에 따른 여파가 그만큼 크다.

화인코리아에 오리를 공급해 온 광주 전남.북의 2백50개 오리사육농가들이 긴급 구성한 협회 관계자는 "5월부터 받지 못해 밀린 사육 수수료가 60억~80억원(어음지불 농가 포함)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한편 경상북도도 조류독감이 발견되면서 22일 오후부터 감염 오리에 대한 살처분이 시작됐다. 이날 오후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손모(60)씨 오리농장에는 방역복을 입은 공무원 20여명이 투입돼 사육 중인 오리 1만3천여마리에 대해 살(殺)처분을 실시했다.

그리고 고병원성 조류독감으로 판정된 닭들에 대한 살처분도 곧 실시될 계획이다.

경주.천안.나주=송의호.조한필.천창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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