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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계란에 흰 쌀밥, 어릴 때 그걸 못 먹어서 요즘도…”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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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04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앙SUNDAY가 중앙일보와) 별도 법인은 아니죠?”

[이명박 前 서울시장과의 대화] 약한 사람 만나면 본능적으로 흐물흐물해져 … 아이들에게 재산 물려줄 계획 없어

올 1월 서울 가회동 자택의 이 전 시장과 부인 김윤옥(60)씨.

-법인은 같습니다. 따로 본부로 있습니다. 요즘도 새벽 5시 기상시간은 일정하십니까.
“오랜 습관이니까 조금 고쳐 보려고 해도 잘 안 돼요. 허허허.”

1976년 강릉 경포대의 현대건설 수련회. 왼쪽 줄 세번째 상의 벗은 이가 이 전 시장.

-일요일에 신문이 없어 금단현상을 느낀 적은 없습니까.
“일요일에 우리나라는 아무 것도 없으니까…습관적으로 신문을 찾지요. 일요일 새벽에 대문간에 나갈 때가 있지요. 착각을 하고. 내가 ‘신문 안 왔느냐’고 물으면 ‘오늘 일요일이잖아요.’ 그래요(웃음). 근데 외국엔 다 일요일에 신문이 있잖아요.”

-예. 있습니다.
“이번에 잘 됐어요. 읽을거리가 (생겨서).”

1989년 1월 소련 모스크바의 레닌 동상 앞에서 정주영 회장(가운데)과 함께.(상) 1957년 입학한 포항 동지상고 생활기록부의 이명박.(중)이 전 시장이 신는 약 10년 된 구두와 너무 오래 써 이름표 한쪽이 떨어져 나간 가방.(하)

-대선 후보인 현재를 포함해 가장 보람 있었던 때가 언제입니까.
“하하. 성격이 다 달라서. 기업 있을 때와 서울시장 할 때를 비교해 대답은 힘들고요. 자동차를 만들어 미국에 수출한 이후에 미국을 다니니 자동차를 수출한 나라의 기업인이라고 대우가 다르더라고요.”

-포니였습니까.
“포니 엑셀. 그때 시애틀인가 삼성 그룹 본부장이 와서 자동차 수출로 ‘메이드 인 코리아’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며 인사를 하더라고요. 대기업 간 관계가 썩 좋을 때도 아닌데. 2차 오일쇼크로 국가 도산 직전에 갔을 때 중동에 진출한 근로자들이 ‘1달러라도 현지에서 쓰지 말고 본국으로 보내자’며 애국심을 발휘하고 돈 벌러 왔다기보다는 ‘나는 산업 역군이다’라는 긍지를 갖는 것을 보며 민간 기업에 있으면서도 애국한다는 심정으로 할 때 뿌듯한 게 있죠. 내 기억에 남덕우 부총리 같은데 지도자들이 중동의 달러 때문에 나라가 위기에서 살아나게 됐다고 했는데, 뭐 굉장했었죠.”

-책 『어머니』에 보면 ‘난 아버지를 보며 가끔은 아내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해주는 남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셨는데, 실제로 부인께는 어떻게 애정표현을 하시나요.
“역시 늘 보고 배운 가정교육이…나도 그렇게 씩 웃고(이 답변에서 그는 내내 미소를 지었다). 대신 결혼기념일에 맞춰 장미다발을 보내주는 건 한 해도 안 뺐어요. 꼭 카드를 썼어요. 뭐 많이 쓴 거지 지금 30년 넘었으니까, 매년 썼으니까. 아버님보다는 진일보한 거죠, 내가, 하하. 우리 아버지는 그냥 (어머니가) 듣지 않는 데서 자식들한테 ‘야 너희 어머니가 말이지’ 하는 간접적 표현을 쓰는데 나도 직접적인 표현은 쑥스럽게 생각되고. 그래도 그렇게 표현하는 게 있지요. 요새 우리 와이프는 인터넷으로 막 나한테 써요 편지를. ‘당신 오늘 나와서 이런 거 별로 마음에 안 들어요, 이런 거 참 마음에 들어요.’ 뭐 이렇게. 인터넷이 그런 건 좋더라고요.”

-답장도 보냅니까.
“물론 보내죠. 혹시 밤 늦게 들어와 못 보면 ‘오늘 e-메일 확인 안 해 봤느냐’고 슬슬 눈치 줘요. 그럼 아 오늘 뭐 하나 썼구나 알고 그 다음 날 간단하게 쓰고.”

-책『신화는 없다』에서 ‘재산을 자녀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했는데.
“내가 그 책을 쓸 때는 아이들이 어렸어요. 그 이야기는 독자를 향해서 쓴 것은 아니고 혹시 아이들이 보면 ‘우리 아버지는 그런 생각을 갖고 있구나’ 하는 것을 일찌감치 알도록 하기 위해서, 조금 의도성이 있는 거죠.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애들도 으레 아버지는 그렇게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부담이 적죠.”

-여전히 재산은 물려주지 않을 생각인지.
“내가 쓸 계획이 짜여져 있기 때문에 여유가 없어요. 나는 일찌감치 CEO를 떠나면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없을 거 같아요.”

-어머님께서 애초에 중학교만 보내려 하셨는데 섭섭한 마음은 없었나요.
“그거야 뭐 말할 거 없지요. 특히 어린 나이에 다들 가는 고등학교를 못 간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부담이 굉장히 큰 거지요. 쉽게 ‘너 고등학교 못 간다, 돈 벌어라.’ ‘예, 어머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뭐 이러겠어요. 굉장한 저항이 있었던 거지요. 그때 우리 동네에서 좀 떨어진 데 미군부대가 있었어요. 중학교 졸업하고 (허드렛일을 하는) 하우스 보이로 취직하려고 말도 한마디 못 하는데 미군부대를 찾아갔다고요. 거기 가서 잘 보이면 공부도 할 수 있다는 거예요. 막사에 가니 짐도 싸고 지저분한데 손짓 발짓 해가며 일하고 싶다니까 장교가 끄덕끄덕 하더라고요. 나이 든 분이 시레이션(미군 전투식량) 박스를 줘서 내일부터 일하나 보다 했는데 알고 보니 그 부대가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버렸더라고요. 이동 준비하는 데 간 거예요. 하우스 보이 들어가 잘하면 미국에 따라갈 수 있다고, 따라가면 공부를 한다고들 했는데 그것도 실패한 거지요. 생각해 보면 그게 잘된 건지 잘못된 건지…. 하여간 그렇게까지 공부가 하고 싶었어요. 안 하고 싶었겠어요?(그의 목소리가 갈라지듯 약간 높아졌다). 그래도 운이 좋아서 그 뒤 야간학교라도 간 거지요. 거 어떻게 말로 표현하겠어요.”

-현대 입사 12년 만인 35세에 사장이 돼 15년간 10개사의 대표이사를 지냈습니다. 고속 출세 과정에서 동료, 선후배의 질시를 받았을 법한데.
“차이가 많이 나니까 동료들은 문제가 없는데 대선배님들, 나를 면접했던 중역이 부하가 된다든가, 현대건설이 모기업이니까 그룹을 관장하는 위치니까 저 위에 있던 연장자, 간부, 이런 분들한테 질시라고 할지 견제라고 할지…. 그런데 충분히 이해는 돼요. 그걸 내가 빨리 이해한 거 같아요. 근무 시간이 끝나면 옛날 상사, 옛날 연장자 그대로 깍듯이 하고, 이런 노력을 많이 하긴 했는데, 결국 회사의 성과 같아요. 내가 젊은 CEO지만 그룹 일이 성과가 나옴으로써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따라오게 됐으니까. 그러나 어려운 점은 있었습니다. 사장 임명을 두 달인가 사양을 했습니다. 대선배 한 분을 내가 공동대표로 해달라고 했어요. 그 분은 너무 차이가 났었어요. 그런 주장을 하며 두 달간 사양하고 그랬기 때문에, 아 저 친구가 권력을 막 행사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 좀 알려진 거 같더라고요. 그러면서 빨리 화합해 일하는 계기가 된 거 같았어요.”

-1992년 초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정치 참여를 계기로 정 회장과 결별했습니다. 그때와 지금 정 회장에 대해선 어떤 감정이십니까.
“(이 대목에서 그는 긴 시간을 할애했다) 나는 그냥 그분이 정치를 안 하시고도 국가적인 큰일을 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사실 기업 중에서 내가 가장 먼저 북방정책을 시도했던 사람인데 정 회장을 모시고, 처음엔 반대하셨지만, 소련 측 만나게 되고 소위 페레스트로이카(개혁)를 부르짖는 고르바초프를, 아마 고르바초프가 그 당시 기업인을 만난 것은 첫 케이스이지요. 그때 고르바초프에게 ‘북한이 그대로 가면 핵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때는 아마 (북한이)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때 같아요. 소련이니까 알잖아요. 물론 그 이야기가 한국에 와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 픽 웃고 말더라고요, 우리 정부는. 당시에 정주영 회장이 국제적인 인물로 떠오르면서 정치를 하게 됐으니까 나는 말리고 싶었죠. 그 위치에서도 그런 일 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남북 문제에 있어서 그렇고, 그 당시 소련 갔다 와서 바로 북한 방문했으니까. 여러 가지 만류를 했는데 잘 안 됐어요. 일생을 기업하면서 (나와) 얘기를 많이 했는데, 그건 받아들였다가 또 않고 이러시더라고요. 형제들도 그렇고 자제들도 그렇고 만류했으면 좋겠다고. 그 당시에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나에게 부탁을 했을 텐데 몸을 던져, 모든 것을 걸어서 말렸다면 어땠을까. 내가 온몸을 던져 말릴 생각을 하지 않고 ‘안 되면 나는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 후에 해보는 거예요. 처음 이런 얘기를 하지만(어느새 그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그랬으면 정주영 회장의 말년 생애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이런 생각도 해보는데, 다 부질없는 생각이고. 아무튼 견해가 달랐던 거지요. 인간적이라든가 이런 점에서는 서로 속마음은 똑같이 인정하고 있었다고 봐야죠. 그러나 외형적으로 나온 일에 대해선 동조가 안 됐으니까 좀 섭섭하고 그랬죠. 근본적인 생각을 바꾼 건 없었어요. 중간에 생일 때 되면 가서 만나기도 하고. 몸이 아파 누워계실 때도 (찾아가니) ‘야 언제 몸 나으면 소련에 한번 가자. 고르바초프 다시 좀 만났으면 좋겠다.’ 그런 얘기를 하시고 그랬죠.”

-어린 시절 고생을 한 분들은 그 시절 많이 먹은 음식이 지긋지긋하거나, 늘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다는데.
“어릴 때는 제일 좋은 게 그냥 달걀인 거 같고, 흰 쌀밥에 달걀 깨 넣어 가지고 간장에 해서 먹는 게 최고 음식으로 생각했지. 그런데 어릴 때 그걸 못 먹은 거죠. 그래 내가 요즘 일식집에 가면 꼭 달걀 먹잖아(웃음). 단골 집에 가면 뜨거운 밥에다 계란 딱 갖다 놓는다고요, 내 앞에. 비싼 집에 가서 싸게 먹어요.”

-장사를 굉장히 많이 하셨는데 가장 이문이 남았던 장사는요.
“내가 과일ㆍ뻥튀기 장사 했다지만 알려진 것 이외의 장사를 더 많이 했어요. 좀 구차스러워 다른 거 얘기를 안 하는데 내가 70 넘어 은퇴하면 책을 쓸까 하지요. 없는 사람 상대하는 장사가 돈이 남는 게 별로 없어요. 장사는 부자를 상대해야 돈이 생기지. (없는 사람 대상의 장사는) 얼마나 더 열심히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하느냐, 그거 가지고 이익이 좀 더 생기고 덜 생기고 하는 거지.”

-만약 대통령이 되면 목포상고(김대중 전 대통령), 부산상고(노무현 대통령)에 이어 3대에 걸쳐 상고를 나온 분들이 대통령이 되는 건데.
“목포상고ㆍ부산상고 이런 학교들은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대부분 갔다고요. 상고 출신들이 인재가 많이 났어요. 대학 출신보다 상고 출신들이 은행장 한다든가 이런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다닌 상고는 가난하지만 머리가 좋았다, 이건 내가 말할 순 없고. 상고 나온 사람들이 아마 어떤 상황을 놓고 서바이벌 하겠다 하는 의욕은 그 당시 시점에 인문학교 학생들보다 더 강했을 수가 있습니다(이 대목에서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지금 상고는 조금 또 달라졌지만. 뭐 상고하고 대통령 되는 거하고 상관이 있겠어요. 어떻게 하다 두 사람이 저 전남에서 경남 쪽으로 넘어온 거지. 경북으로 올라오면 좋긴 좋겠는데(웃음이 터졌다. 곧이어 그의 목소리 톤이 가라앉았다) 올라가기가 그렇게 쉽지 않네요.”

-사람을 쓰시는 기준은.
“한국과 선진국은 다릅니다. 선진국은 철저히 능력 위주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뽑아 쓰면서 문제가 있으면 내보내고 다시 능력 있는 사람을 쓰고 하면서 발전하는데, 한국은 역시 인간성에 대한 것을 많이 보지요. 왜냐면 우리가 과거 산업사회에 일을 할 때는 투명하지 못했어요, 모든 일이. 그러니까 신뢰가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상사 간에, 동료 간에. 그래서 인간성을 많이 봤어요. 근데 서양사람들은 모든 게 투명하니까 거기에 무슨 인간성이고 뭐 있을 게 없는 거예요. 한국 사회는 남 앞에 확 펼쳐서 보여줄 수 없는 일이 많아요. 지금은 디지털 시대가 돼서 그렇지 않은데 과거에는 뭔가 (두 손을 맞잡으며) 끼리끼리 도모해야 되는 일이 많았다 말이에요. 나는 기업에 있을 때도 긍정적 사고와 적극적 사고를 가진 사람을 선호했지요. 아무리 실력 있고 능력이 있다 해도 적극적이지 못하고 부정적 생각을 가진 사람은 그 조직을 발전시킬 수 없다고 봤지요.”

-정치인으로서 사람을 보는 기준도 같나요.
“정치는 내가 경력이 원체 짧으니까. 정치 철학이 좀 같았으면 좋겠다 하는데, 그게 같은지 안 같은지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그건 만나면 같아지더라고요. 나에게 오면 같아지고(웃음). 달랐다가도 같아지고. 그게 꼭 기준이 될 수는 없다고 보는데, 정치는 역시 신뢰성이 상당히 중요한 게 아닌가 생각해요. 시대 자체가 약간은 개혁성향이 있는 사람이 좋다, 너무 과거지향적인 것보다는 약간의 신뢰가 있으면서 약간의 개혁적인 정신을 가지면 좋겠다는 게 내가 지금 정치를 시작하면서 느낀 거지요. 우리가 개혁적 성향이고 미래 지향적인 사고를 갖고 있거든요.”

-청계천 복원 자체보다 주변 상인들을 설득한 대목을 평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업에 있을 때 일의 70, 80%가 해외에서 일어나는데 해외에선 밀어붙여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지요. 결국 협상하고 타협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몸에 배어 있는 입장이지요. 때론 양보할 수도 있고 때론 우리 생각을 관철할 수도 있고. 정치도 그게 많이 요구된다는 생각이 드네요. 협상과 타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상대 입장에 있었을 때를 이해하면 쉽지요. 상인들하고 얘기하면서도 이 약한 노점상들의 심정은 어떻다, 이거 내가 경험이 있었던 거지요. 나도 그렇게 살아봤으니까. 그분들이 볼 때는 서울시장이 권력 있는 사람의 입장이지요. 나는 야당이 힘이 없다고 말을 하지만, 그건 내 논리지 그 사람들한테 안 통한다는 것을 내가 아는 거죠. 길에서 장사하는 입장에서 어떤 말을 하면 가장 거북스러워하고, 어떤 말을 하면 정말 마음에 와 닿는다는 것을 비교적 남들보다는 잘 아는 거지요.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대상하고 (영국)파이낸셜 타임스 2005년도 세계 인물 대상의 평가 기준이 전부 그거더라고, 설득(이 답변에서 그는 주먹을 쥐거나 손을 내뻗는 등 풍부한 제스처를 사용했다. 자부심이 밴 음성이었다).”

-노점상에게 해서는 안 될 말을 아신다고 했는데.
“한국 사람들은요, 누구나 자존심이랄까 그게 있다고요. 그걸 건드리면 그날 굶더라도 바가지 다 깬다고요. 길에서 장사하고 있는 분도 잘 격려를 하면 ‘저 사람이 우리 편이다’는 생각을 할 수 있지.”

-콤플렉스가 있습니까.
“남 모르는 콤플렉스가 없는 거 아니죠. 늘 기가 죽어 살았잖아요, 어릴 때. 같은 나이 아이들하고 어울릴 수도 없고, 그죠. 거기는 학생들이고 나는 학생 같지 않은 학생이고. 정상적으로 잘되고 있는 가정의 자제들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완전히 외톨이 아녜요, 그죠. 동네에서 학교 갔다 온 애들은 자기들끼리 놀아도 난 그 애들하고 안 어울리죠. 자연적으로 내 성격이 내성적으로 될 수 있고 그 나이에 콤플렉스에 빠지죠. 그런 한두 가지가 있었지만 대학 들어가면서 극복하려고 인위적으로 노력을 한 거죠. 대학 때도 내가 새벽에 쓰레기 갖다 버리는 일을 하며 대학을 다닌다는 것을 가장 친한 친구도 몰랐습니다. 내 생각에 굳이 가르쳐 줘서 내가 도움 받을 것도 아닌데, 약점을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는지도 모르죠.”

-지금은 다 극복한 겁니까.
“뭐, 콤플렉스는 없어졌지만, 나는 되게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나 되게 처절하게 가난한 사람을 딱 만나면 되게 약해지죠. 나는 강한 사람 만나면 무한히 강한 힘을 발휘하는데 되게 약한 사람 만나면 흐물흐물하는 거죠.”

-옛날 생각이 나서 그런 겁니까.
“그게 뭐 생각해서 그렇게는 안 될 거야. 순간적으로 그 사람들에게는 무한히 약해지죠. 그런 약점이 있죠. 내가 회사에 있을 때도 해고 기준에 맞아도 일 그만두면 온 집안에 큰일이 날 정도란 걸 알고 나면 그건 예외로 했던 경험도 있어요. 사실 그 외에는 요런 것도 용납 안 하는데. 그건 그냥 본능적이랄까. 그래서 내가 대통령 되면 약자들은 많이 좋아질 거예요(웃음).”

-관상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어요. 정식으로 관상을 본 적 전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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