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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욕망이 함께 뛰는 축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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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호 18면

잉글랜드 리버풀을 2-1로 꺾고 ‘유럽챔피언스리그’ 우승을 거머쥔 이탈리아 AC 밀란 선수들이 24일 밀라노에서 환영 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다. 밀라노 AP=연합뉴스

공보다 사람이 빠를 수 없다
- 발레리 니폼니쉬 (전 부천 SK 감독)

유럽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열린 지난 수요일, 낮에 강의가 있었고 저녁에 토론회가 있었으며 밤에 모임이 있었다. 낮의 대학생들은 누가 우승할 것이냐고 물었다. 나는 “사랑하는 제라드(리버풀잉글랜드)보다 존경하는 말디니(AC 밀란이탈리아)가 우승할 것”이라고 말했다. 토론회가 끝난 뒤 열렬한 축구광인 문학평론가 김명인 역시 AC 밀란의 우세승을 점쳤다. 밤의 모임에서도 유럽 축구가 화제였다. 열 일 마다하고 오로지 축구만 앞세운 것은 아니지만 어색한 시간의 빈 틈을 이제는 축구가 잘 채워 주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축구는 고통 없이 나눌 수 있는 테마가 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섬세한 패스워크로 그라운드를 넓게 쓴 AC 밀란이 우승했다.

축구는 삶과 죽음의 문제, 그 이상이다
- 빌 쉥클리 (전 리버풀 감독)

1960~70년대에 리버풀을 최고 명문으로 끌어올린, 어느 광고 문구에 ‘타인의 영혼을 일깨운’ 사람으로 표현된, 그러나 갑자기 은퇴를 선언하여 타인의 영혼에 충격을 주었고, 그 뒤에는 후임 감독의 위상을 고려한 구단 방침 때문에 클럽하우스 근처를 배회하며 자신의 영혼에 충격을 준, 빌 쉥클리 감독은 축구가 “삶과 죽음을 초월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정도는 아닐지라도 지금 한국의 축구 열풍은 잠을 자느냐 마느냐 하는 일상의 문제가 되고 있다. 게다가 지난 목요일 새벽에 열린 바로 그 경기는 월드컵도 아니고 올림픽도 아니며 박지성이나 이영표의 프리미어리그도 아닌, 그동안 ‘한국인’의 밤잠을 설치게 했던 그 민족적 혈흔이 단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는 경기였는데 이를 ‘리얼 타임’으로 목격하고야 말겠다는 의지는 이제 축구가 민족적 지평에서 문화적 지평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한 사이클이 지나갔다
- 지네딘 지단 (전 프랑스 국가대표)

우리가 잠시 잊고 있는 중요한 사실 중 하나는 지난해 월드컵의 우승국이 이탈리아라는 점이다. 준우승에 머문 프랑스의 지단은 언젠가 “한 사이클이 지나갔다”면서 은퇴 선언을 했는데 이탈리아의 주축이면서 AC 밀란의 주전들인 말디니, 인차기, 네스타 같은 노장들은 여전히 그들만의 사이클을 유지하고 있다.

라틴 문학을 대표하는 에두아르도 갈리아노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선수들은 ‘혹사당하는 고액 연봉자’다. 리그전, 국가 대항전, 클럽 대항전, 그리고 미디어와 대기업이 제시하는 다양한 스케줄에 의해 선수들은 그라운드 안팎에서 끝없이 연장전을 치른다. AC 밀란의 노장들이 월드컵과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한 것은 이 같은 현실의 반영이다. 노련하고 안정적인 실리 축구가 대세다. 물론 화려한 기술에 대한 갈증만으로 말디니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AC 밀란의 영혼으로 불리는 이 노련한 캡틴은 단 한 번의 태클도 시도하지 않으면서 리버풀의 공격을 차단했다. 경기가 격렬해질수록 오히려 냉정해지는 말디니의 수비 ‘기술’은 그 어떤 공격 축구보다 ‘화려하고 아름답다’. 그들의 사이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축구는 생태학적 균형을 잡는 스포츠다
- 호르헤 발다노 (전 아르헨티나 대표, 전 레알 마드리드 단장)

현역 시절의 기상천외한 슈팅만큼이나 촌철살인의 잠언으로 유명한 호르헤 발다노는 축구가 “생태학적 균형을 지향하는 경기”라고 말했다. 11명의 선수가 어떻게 팀 밸런스를 유지해야 하는가 하는 얘기다. 실전에서는 이 생태학적 균형이 평균대 위의 체조 선수처럼 언제나 불안정하게 유지된다. 최상의 균형을 향하여 22명이 90분 동안 뛰어다니는 바로 그 과정이 축구를 완성한다. 이 점에서 아스널의 명감독 아르센 웽거는 “내가 추구하는 축구가 5분 만이라도 실현된다면 그것으로 그 경기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금 유럽 축구는 그라운드 바깥에서도 생태학적 균형을 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잉글랜드 리그의 경우 향후 3년 동안 전 세계 208개국 미디어로부터 무려 1조1550억원의 중계권료를 받는다. 여기에 모바일폰ㆍ인터넷 중계 등을 더하면 약 5조원의 수익이 예상된다. 이는 각 클럽의 광고ㆍ입장료ㆍ이적료 등 고정 수입을 제외한 것이다. 이 엄청난 ‘블루 오션’을 은하계의 최대 부자들이 가만둘 리 없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미국 글레이저 가문), 첼시(러시아 석유 재벌 아브라모비치), 풀럼(이집트 재벌 알파에르), 뉴캐슬(미국 헤지펀드 폴리곤)에 더하여 리버풀 역시 리비아의 카다피, 태국의 탁신 전 총리,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 정부 등의 경합 끝에 미국의 스포츠 재벌에 넘어갔다.

축구연맹, 구단주, 미디어, 글로벌 기업 등이 서로 맞보증을 서면서 벌이는 사상 최대의 ‘블루 오션’ 작전 때문에 선수들은 더 많은 경기를 더욱더 격렬하게, 그야말로 온몸을 던져 치러내야 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미학적 관점에서 생태학적 균형을 천명했던 발다노의 선언은 이제 다윈의 관점에서 적자생존의 생태계적 균형으로 바뀌어야만 할 것 같다.

그대는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
- 리버풀 응원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스폰서인 미국 보험회사 AIG는 맨유의 티셔츠에 로고를 새기는 대가로 1년에 2800만 달러를 지불한다. 어느 주주가 ‘영국에 왜 그렇게 많이 투자하느냐’고 물었을 때 AIG의 마틴 설리번 CEO는 “영국이 아니라 아시아에 투자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맨유의 팬은 세계적으로 7500만 명가량인데 이중 절반이 넘는 4100만 명이 아시아 팬이다. 이 막대한 시장을 향해 해마다 여름이면 맨체스터는 ‘아시아 투어’를 다닌다. 그리고 그것은 땅 끝까지 중계된다.

이처럼 축구라는 길 위로 선수와 팬만 걷는 게 아니라 수많은 욕망이 함께 걷고 있는 것이다. 정치권력과 직렬하려는 욕망, 광고 수익으로 병렬하려는 욕망, 다채널 다매체로 흡수하려는 욕망 등이 선수들을 혼자 걷지 않게 하고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축구를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선수들과 함께 걷는 행렬이 스폰서와 권력자와 미디어뿐이라면 얼마나 우울한 풍경인가. 비록 새벽잠을 설치는 것이 대단한 정치적 행위는 아니지만, 졸린 눈을 비비며 생중계의 증인이 되는 것은 선수들이 권력자들 틈에서 비참하게 걷지 않도록 하려는 열렬한 사랑인 것이다.

리버풀. 19세기 빅토리아조 ‘대영제국’의 항구 도시로 근대적 산업국가의 중추였던 이곳은 이제 두 개의 문화적 상징으로 버티고 있다. 바로 비틀스와 축구 클럽이다. ‘더 콥(the kop, 리버풀 서포터스 애칭)’은 언제나 비틀스의 노래 ‘그대는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you`ll never walk alone)’를 부른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지거나 이기거나, 그들은 늘 선수와 함께 걸으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니 우리도 리버풀의 아름다운 팬처럼 목이 쉬도록 불러보지 않겠는가.

“폭풍우 속을 걸을 때 고개를 높이 들라. 그리고 어둠을 두려워 마라. 폭풍우 끝에는 황금빛 하늘과 종달새의 아름다운 노래가 기다리고 있으리라. 나아가자, 바람을 헤치고. 나아가자, 빗속을 뚫고. 그대는 결코 혼자 걷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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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수씨는 문화평론가이자 축구평론가로 『축구장을 보호하라』를 펴냈으며 문화단체 ‘풀로엮은집’ 사무국장, MBC 축구 해설위원으로 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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