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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이 나눈 편지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호 11면

권정생 선생은 살아서 여러 이웃에게 편지를 썼다. 고인이 된 교육학자 이오덕(1925~2003)과 글 쓰는 나무꾼 전우익(1925~2004), 이현주 목사, 정호경 신부, 작가 권오삼씨 등에게 속마음이 드러난 글을 띄웠다. 선생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편지 몇 편을 옮겨놓는다.

편지1 현주야, 우린 아가가 되어 살자꾸나. 구차하게 어른들 흉내 내지 말고, 점잖지 말고, 푸른 하늘이 되자. 지금 우리들은 꽃도 없어. 어린 왕자가 자기의 별에 두고 온 장미꽃처럼, 우리들의 꽃도 아마 아득히 먼 나라에서 우리처럼 외로워하고 있는지도 몰라. 참으로 외롭구나. 내가 슬퍼하는 건, 골덴(코르덴) 바지 때문이 아니야. 고무신 때문도 아니야. 꽃이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아무도 모른다.

편지2 정호경 신부님, 『몽실언니』라는 책을 보냅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불쌍한 사촌 누이동생 이야기이기도 하고, 제비원 산다는 어느 아주머니 얘기이기도 하고, 뭐 이런 불행한 사람이 너무 많아 한번 써 본 것입니다. 신부님, 우리 역사가 그렇고, 세계의 역사가 다 그렇듯 정죄받을 사람은 가해자 몇 사람뿐이라고 봅니다. 위로받아야 할 사람에게 우리는 백 마디, 천 마디 말로는 되지 않습니다. 내가 그들처럼 불행해지든가, 아니면 그들을 불행에서 건지는 두 가지 길뿐입니다.

편지3 전우익 선생님, 추운 겨울에 오히려 벌거벗고 살아가는 나무들을 보고, 그 모습이 너무도 늠름하여 인간으로서 초라해집니다. 가끔 들판에 나가 아직 흰 눈에 덮인 산야를 둘러봅니다. 모두가 겪고 있는 이 겨울의 고통을 바라보고 있으면 돌멩이 하나까지도 떼어 놓을 수 없는 동질성을 느끼며 쓸어안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편지4 오삼 아재, 인간은 어느 정도의 분수를 지키며 살아야 할까? 우리는 스스로를 기만해서는 안 되겠지. 우리들의 현실, 옛날에도 그랬지만 너무도 어둡구나. 어떻게 휴전선이라도 틔워져야만 최소한의 인간으로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모두가 미친 상태야. 부디 우리 적은 숫자의 인간끼리라도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자꾸나. 그러면, 나는 외롭지 않다.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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