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딕 체니式 사냥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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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관점에서 사냥만큼 무도(無道)한 취미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가장 가까운 취미가 사냥이라고 말하는 문화인류학자들도 있다. 농경문화가 뿌리내리기 전 인류에게 수렵은 취미가 아니라 생존 수단이었다.

취미 자체를 탓할 수야 없는 일이지만 딕 체니 미국 부통령이 특별한 취미 때문에 구설에 올라 있다. 미 언론 보도에 따르면 얼마 전 그가 펜실베이니아에 있는 한 사냥클럽에서 꿩 사냥을 했는데 야생 꿩이 아닌 사육 꿩을 대량으로 살상했다는 것이다. 체니 부통령은 동료 9명과 함께 지난 8일 오전 한나절 동안 그물에서 풀려나온 5백마리의 사육 꿩 중 4백여마리를 엽총으로 쏘아죽였으며, 혼자서만 무려 70여마리를 사냥하는 정력적 솜씨를 선보였다고 한다.

발끈한 동물보호협회 미국 지부는 "전통적인 수렵 윤리를 저버리고 옴짝달싹 못하는 상태의 동물들을 대량 학살한 체니 부통령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고 비난하는 성명을 냈다. 사냥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독 안에 든 쥐 잡기'식의 독특한 사냥법이 논란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신사.숙녀 여러분, 우리가 그를 잡았습니다."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미국의 이라크 점령 통치 책임자인 폴 브레머 최고행정관은 흥분한 어조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의 체포 사실을 발표했다. 미군 측이 설명하는 후세인 체포 작전의 전말을 전해들으면서 체니식 꿩 사냥법을 떠올렸다.

사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자체가 체니식 사냥이었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압도적 무력 앞에서 애초부터 이라크는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라크군은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해 보고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이라크 공격의 당위성을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주입시킨 세력이 '네오콘'으로 불리는 신보수주의자들이고, 그 선봉에 체니 부통령이 있다는 점에서 후세인 체포는 체니식 이라크 사냥의 완결을 의미한다.

네오콘의 이론가인 로버트 케이건 카네기 국제평화기금 수석연구원의 말대로 망치를 쥔 사람에게는 모든 문제가 못으로 보이고, 총을 가진 포수에게는 모든 문제가 사냥감으로 보인다. 칼 한자루만 달랑 쥔 사람은 숲 속의 사나운 곰을 피해가며 살지만 총을 가진 사람은 곰을 쏘아 쓰러뜨리고 편히 사는 쪽을 택한다. 이라크 문제를 보는 미국과 유럽의 시각차에 관한 케이건의 영리한 비유였지만 총을 가진 미국이 취한 선택은 결국 가금(家禽) 사냥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거미 구멍'에 숨어 있던 '악의 화신'을 사로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내 반미 저항 세력의 테러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오히려 격화하고 있다. 후세인 체포가 결코 문제 해결의 열쇠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이 체니식 사냥을 통해 잡은 것은 후세인 체제일 뿐 이라크가 아니다. 총으로 정권을 잡을 수는 있어도 민심까지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체니 부통령 측은 사육 꿩 사냥 논란이 확산되자 잡은 꿩들을 깨끗이 씻어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 빈민 구호단체에 기부했다고 밝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냥 방식에는 문제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했다는 해명이다.

지금 미국이 할 수 있는 좋은 일은 후세인이 없는 이라크를 이라크 사람들에게 하루 빨리 돌려주는 것이다. 이라크 재건은 미국보다는 유엔이 맡아 지원하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의견이 많다. 조속한 주권 이양은 이라크 문제를 조기에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이다.

배명복 기획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