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툼한 약봉지」 처방않는 미국(특파원 코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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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영리보다 국민건강” 의료관행 철저
최근 심한 기침을 동반한 감기로 처음 미국 병원을 찾아갔다가 우리와는 너무 다른 몇가지 제도상 차이를 경험했다.
증상이 심한 것 같아 한국에서와 같은 생각으로 집근처 종합병원에 전화를 해 진찰시간 약속을 신청했다.
그러나 병원관계자는 증상과 집주소를 꼬치꼬치 캐묻고는 집근처 일반의원 몇군데의 전화번호와 주소를 알려준후 일단 그 의사들을 찾아가 상의하라고 했다.
병원측은 응급처리를 요하는 중환자가 아닐 경우 1차 환자나 경환자는 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찾아간 의사는 다른 병이나 알레르기 증상 유무를 물은후 한가지 약이름이 쓰인 처방전과 약에 대한 설명을 해준후 가까운 약국에서 구입해 복용하라고 말했다.
여러가지 약이 섞인 약봉투를 들고 나오는데 익숙해진 한국인에게는 조금 의아스런 처방이었다.
이를 눈치채고 뭐가 잘못되었느냐고 묻는 의사에게 『왜 당신이 직접 약을 주지 않느냐,또 한가지 약으로 심한 감기가 낫겠느냐』고 되물었다.
그 의사는 오히려 이상한 표정으로 그 약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약이 여러가지 성분으로 만들어졌으며 다른 약과의 상호작용이 약효과에 어떤 영향을 주고,어떤 부작용을 야기할지에는 연구가 되어 있지 않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는 따라서 불가피하게 두가지 약을 처방할 경우에도 복용시간이 달라야 한다고 친절하게 일러주었다.
그는 또 서로 다른 성분을 가진 수많은 약의 상호 상승관계를 검증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고 어느 약이던 어떤 증상을 치료하는데는 충분한 함량을 갖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효능을 갖는 약을 중복해 복용하는 것도 좋지 않다고 했다.
처방전을 갖고 찾아간 약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해보았으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이 약사는 한가지 이상의 약을 동시에 복용할 경우 두 약이 갖고 있는 효능이 제대로 나타날지 알 수 없고 부작용이 몸을 해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약사가 항생제를 비롯한 치료약을 고객들에게 스스로 처방하거나 조제하는 것은 미국에서는 허용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판매되는 약은 의사처방이 있어야만 살 수 있는 것과 처방없이 살 수 있는 일반 매약 두 종류로 나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과잉처방으로 논란을 빚은 항생제는 그것이 내성을 높이는 부작용 때문에 의사의 처방없이는 결코 판매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의원이나 약국을 불문하고 경미한 감기 증상에도 환자에겐 이름도 알려주지 않고 여러가지 약을 한데 섞어 두툼한 약봉지에 넣어 주는 한국의 의료관행과는 너무나 다른 것이었다.
병원이나 약국이 국민의 건강보다는 영리를 위해 약을 남용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한국의 의학은 약 성분간 상호작용까지 모두 검증을 마쳤을 정도로 그 수준이 미국보다 훨씬 앞서 있다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다.
물론 후자를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의사와 약사의 철저한 분업이 이루어진다면 불필요하고 해로울지도 모를 처방과 판매가 억제되고 약의 남용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뉴욕=박준영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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