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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전문위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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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국회의 본질적 기능은 법안과 예산·결산안의 심의에있다. 상임위원회를 중심으로한 법안등의 심의과정에서 의원들은 스폿 라이트를 받거나 스타가 되기도 하지만 언제나 그 그늘에는 법안을 다듬고 문제점을 지적해 주는 전문위원이 있다.
한때는 국회의원의 선생님으로 의정활동을 돕는 길잡이가 되기도 했고 때로는 여권의 의지를 법안에 반영해주는 기술자 노릇을 하기도했다. 우리 정치사의 굴곡만큼이나 많은 수난과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따라서 제헌국회이후 13대까지 처리된 5천5백33건의 법안 하나하나에 그들의 영욕과 손길이 함께 배어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회 전문위원은 국회 공무원 모두가 오르고 싶어하는 선망의 자리다. 정무직인 국회사무총장(장관급)과 입법차장·행정차장·도서관장(차관급)등 네자리를 빼면 사무처 직원들이 진급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회 전문위원은 17개 상임위와 예결·통일·박람회특위등 3개 특위에 각1명씩 모두 20명에 이르지만 임기없이 정년까지 보장돼 좀처럼 빈자리가 나지 않는다. 더욱이 법사·재무·예결위 전문위원은 관련 행정부처에 사표를 내고 와 있다 친정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 관례여서 국회공무원들의 전문위원승진은 바늘구멍 들어가기만큼이나 어렵다.
우리나라 전문위원의 원조는 헌법기초위원회와 국회법기초위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48년6월3일자로 유진오·권승렬·고병국·한량조·임문환·노진설·윤길중·노룡호·차윤홍·김용근씨등 헌법기초위 10명, 전규홍·노룡호·차윤홍·김용근·윤길중씨등 국회법 기초위 5명등 첫 전문위원이 임명됐다.
이들중 유진오씨는 훗날 고대총장과 신민당당수등을 역임했고 권승렬씨는 법무부장관을 지냈다. 윤길중씨는 국회부의장·민정당대표등을거쳐 현재 민자당상임고문으로 있다. 면면이 의원들의 스승이라 불릴 수 있을만큼 당내의 명사이자 전문가들이었던 것이다. 이후 이 자리를 거쳐간 사람들은 2백40여명에 이른다.
48년10월2일 제정·공포된 국회법은 국회내에 8개(법사·외무국방·내무치안·재무경제·산업·문교사회·교통체신·징계자격)의 상임위를 설치토록 규정했고 각상위에 위원회가 추천해 의장이 임명하는 전문위원을 두도록 했다. 이에따라 같은해 12월13일 제정된 국회사무처직제에선 각 상위에 전문위원 약간명을 둘 수 있도록 근거 규정을 마련했으며 51년3월 신설된 운영위원회의결로 전문위원수를 25명으로 정했다.
이 무렵 문교사회 전문위원을 지낸(50·11∼51·3) 이항령씨는 문교부차관·홍익대총장등을 지냈다.
그후 전문위원수는 53년1월 예결위가 재정경제위로부터 분리 신설됨으로써 30명으로, 54년12월의 부흥위 신설에 따라 이듬해 11월 32명으로 각각 늘어났으나 56년11월 공무원감축시책에 의해 예결위와 재정경제위의 1명씩이 줄어 들었다.
제2공화국의 5대국회 시절엔 양원제 실시로 인해 전문위원이 크게 늘어났다. 민의원의 경우 종전의 30명에서 변동이 없었으나 참의원에 위원회별로 1∼3명씩 20명의 전문위원이 새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52년3월부터 61년2월까지 9년 가까이 법사위 전문위원을 맡았던 헌법학자 서일교씨는 박정희대통령에게 발탁돼 총무처장관과 법원행정처장 자리까지 올랐다.
5·16군사혁명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는 63년11월 국회사무처법을 제정, 상임위에 일반직 국가공무원을 배속할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데 이어 64년1월 전문위원 자격전형에 관한 규정을만들어 「군장성급장교로 2년이상 재직한 사람」을 추가시킴으로써 군출신등 외부인사가 진출할수 있는 길을열었다. 종전에는 국회내규에 전문위원 임명자격기준을 ▲대학부교수·초급대 부교수이상 ▲2급이상 국가공무원 ▲판사·검사·변호사로 3년이상 근무한 사람등으로 제한해 왔었다.
당시 문교공보 전문위원을지낸 채영석의원(민주)은 『제헌국회이래 전문위원들의 영향력이 상당했으나 5·l6이후 군출신 인사들이 많이 들어오면서 상대적으로 위상이 낮아졌다』고 말하고 『특히 유신이후엔 전문위원들이 여당쪽에 기울어져 야당의원과의 마찰이 잦았다』고 회고했다.
유신선포후 전문위원들에대한 정부·여당의 회유와 압력은 더욱 거세졌다. 법사원의 한 전문위원은 긴급조치폐지를 위해 야당이 제출한 법안에대해 잘못된 것이라는 내용의 검토보고서를 쓰도록 강요받았고 편파적 보고서때문에 야당의원들로부터 사퇴 압력을 받기도 했었다.
공화당정부는 이와함께 73년2욀 국회법을 개정하면서 전문위원의 임명절차를 종전의 각 위원회대신 국회 사무총장의 제청으로 의장이 임명토록 변경해버렸다.
이 무렵에도 전문위원들의 의원진출은 계속돼 내무전문위원을 지낸(66·6∼70·12) 임종기씨가 71년 8대국회에 진출해 10, 11, 12대에걸쳐 4선을 기록했다.
5공 신군부 세력이 집권하면서 전문위원들은 또 한차례 수난을 겪게 된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출신들이 대거 국회전문위원으로 들어오면서 당시 전문위원 33명중 25명이 옷을 벗는 참사를 당했고 위원회 규모에 따라 1∼3명이던 전문위원 수도위원회마다 1명씩으로 줄어들어버렸다.
그러나 이 와중에서 64년2월이래 80년7월까지 16년여동안 운영·내무·외무전문위원을 지낸 우병규씨는 신군부에 발탁돼 청와대 정무수석과 국회사무총장읕 거쳐 12대 국회에 진출하는등 출세를 거듭했다. 이에앞서 법사 전문위원 출신인 이진우씨(75·4∼76·7)는 포정에서, 임두빈씨(72·7∼74·10)는 민정당전국구로 각기 11대 금배지를 달았으며 이준승씨(69· 2∼71·8)는 대법관에 올랐다.
12대국회에 들어선 우씨외에 운영 전문위원출신의 안영화씨(81·4∼85·1)도 민정당 전국구 의원으로 국회에 진출했다. 안씨와함께 80년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활동하다 11대국회 전문위원으로 기용된 김용균씨는 체육청소년부차관을 거쳐 헌법재판소 사무처장으로, 김성훈씨는 국회 사무처 입법차장으로 각각 일하고 있는등 여전치 출세의 길을 달리고 있다.
재무부에서 왔던 이기욱재무전문위원(81·12∼83·7)은 재무부 차관으로 발탁됐으나 이차관은 83년 아웅산사태때 순직하고 말았다.
이차관의 후임 전문위원으로 역시 재무부에서 왔던 서영택씨(83·9∼85·2)는 재무부 세정차관보와 국세청장을 거쳐 건설부장관을 맡고 있다.
6공들어 13대 국회에 도영심전문위원(외무, 85·3∼88·4)이 민자당전국구의원으로 진출했다. 도씨는 여성으로 전문위원이 된 유일한 인사로 특히 영어·불어에 능통해 처음에 의장의전비서로 채용됐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외무위심의관을 거처 이재형국회의장(12대)에 의해 외무전문위원으로 발탁됐다.
전문위원들도 전문가라 하지만 때로 크게 실수해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60년대말 법사 전문위원을지낸 K씨는 「사법경찰관리의 직무를 행할 자와 그 직무범위에 관한법」 개정안을 심의하면서 사법경찰관 직무범위중 산림공무원을 누락시켜 사표를 쓴 일은 아직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박종치운영 전문위원은 『전문위원제도가 미국과 같이 정착되고 발전하기 위해선 나름대로의 권한이 주어져야하며 사무총장·차장등 정무직 자리에 외부인사대신 국회내 인사를 기용함으로써 이미 국장급에 이른 입법고시출신의 우수인력들을 전문위원으로 발탁할 수 있는 기회를 넓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신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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