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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화가의 치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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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소설 속 최명길의 말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고,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하여 못할 짓이 없는" 세상에서 김훈은 "치욕을 기억하라(memento infamia). 삶은 치욕을 견디는 나날이니, 살아남기 위하여 불가피하게 더럽혀지는 인간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죽어서 살 것인가, 살아서 죽을 것인가? 죽어서 아름다울 것인가, 살아서 더러울 것인가?" 김훈이 던지는 물음이다. 주전파의 말은 실천 불가능한 정의였으며, 주화파의 말은 실천 가능한 치욕이었다.

소설에서 김상헌은 송파나루의 늙은 뱃사공을 앞세우고 언 강을 건넌다. 사공은 전날 밤 어가 행렬을 안내했다. "어가는 강을 건너갔고 소인은 다시 빈 마을로 돌아왔는데, 좁쌀 한 줌 받지 못했소이다." 사공의 넋두리다. 청병이 곧 들이닥친다는데 사공은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청병이 오면 얼음 위로 길을 잡아 강을 건네주고 곡식이라도 얻어 볼까 해서." 사공의 여상스러운 혼잣말에 김상헌은 끓어오르는 울음을 억누르고 강을 건넌다. 건넌 뒤 사공의 목을 베었다. '남한산성'의 시대적 함의는 읽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나 소설하고는 담을 쌓았다는 남성들이 이 책에 열광하는 것은 그들의 삶이 사공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민초의 삶은 늘 그러했고, 그러하며, 그러할 것이다. 정의나 이념은 화려하고 삶은 아름답다. 이 소설에는 창궐하는 말의 뒤편에서 생업에 충실한 무명인들의 삶이 맑게 그려져 있다.

"세상에 이럴 수가 있습니까?" 며칠 전 내게 전화한 화가가 노기충천해 쏟아낸 첫마디였다. 일의 자초지종은 이러했다. 10여 년 전쯤 그림만 그려서는 먹고살기 힘들었던 시절, 어떤 사람이 유명 연예인을 대동하고 그를 찾았다. 자기는 아는 연예인이 많은데, 그들한테 그림을 팔아 주겠다는 것이었다. 동행한 연예인한테는 고마움의 표시로 작품을 한 점 선물해 달라고 했다. 화가는 시키는 대로 했다. 그때 건넨 작품은 20여 점. 그 후 종종 무소식이었다. 사기를 당한 것이다. 이 일로 구겨진 그의 자존과 치욕은 치유할 수 없는 화병이 됐다. 그런데 최근 우연한 일로 선물로 주었던 그림이 화랑가에 매물로 나온 것을 보았다. 화가는 급히 그 연예인의 전화번호를 수소문해 연락을 했다.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었다. "나 화가 아무갭니다. 제가 예전에 선물한 그림 팔 생각인 모양이죠? 얼마를 드리면 되겠습니까?" 막말이 오간 끝에 연예인은 사과하고 작품은 회수했다. 이 화가는 사기 사건 이후에도 화랑들과 거래하면서 많은 수모를 겪었다고 한다. 이를 악문 그는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하며 창작에 매달렸다. 최근 그는 가장 인기 있는 화가의 한 사람으로 부상하고 있다.

미켈란젤로.고흐.피카소.이중섭.박수근…. 그 누구도 치욕을 통과하지 않고 우뚝 선 화가는 없다. 15세에 메디치 가문의 수양아들로 들어간 미켈란젤로는 후원자의 변덕과 횡포로 평생 괴로워했다. 그가 봉사했던 메디치가 출신의 레오 10세와 클레멘테 7세를 포함한 7명의 교황은 주로 자신들의 무덤과 조각상을 만드는 일을 시켰는데, 그들의 작품에 대한 부당한 간섭과 박한 보수 때문에 미켈란젤로는 이 일을 '무덤의 비극'이라고 한탄했다. 예술이든 일상이든 대저 그러하다. 김훈의 말은 그래서 심상치 않다. "받아들일 수 없는 치욕은 없고, 치욕과 자존은 다르지 않다."

김순응 k옥션 대표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