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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Movie TV] '우스꽝 연기' 재연배우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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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차례 연장공연을 거듭할 만큼 인기를 누렸던 장진 감독의 연극 '매직타임'(1998년)이 문득 떠올랐다. 무대 뒷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다룬 이 연극에서 고단한 연극배우의 삶을 가장 잘 대변하던 캐릭터는 용수였다. 용수는 주변 연극인들의 비아냥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아동극과 '경찰청 사람들'(당시 방영 중이던 대표적인 재연 프로그램)을 넘나드는, 고단한 연극배우였다.

최근 1백회를 맞은 인기 재연 프로그램 '타임머신'(MBC.일요일 밤 10시35분)의 최다 출연자이자, 제작진이 주는 남우주연상을 받은 소재익(35.(左))씨를 만났을 때 자연스레 '매직타임'의 용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여러 극단을 거치며 배우생활을 했고 한 아동극 극단의 연출자로 자기 작품도 만들었던 그의 요즘 주된 작업공간은 재연 프로그램이다. 연극무대를 향한 꿈과 열정은 여전히 유효하지만 지금은 10분짜리 재연 코너를 위해 하루를 꼬박 투자하고 24만원을 손에 쥐는 재연배우가 그의 삶을 대표한다. 촬영 없는 날이면 서울 도봉동 다예 유치원 등 여섯 개의 유치원을 돌아다니며 연극.체육 과목 선생님으로 변신하는 이유도 아마 자신의 꿈을 확인하려는 안간힘이리라.

소씨는 그가 연출한 연극에 출연했던 한 여배우의 소개로 지난해 5월 '타임머신'에 처음 합류했다. 다른 이들에 비해 출발은 늦은 편이었으나, 짧은 순간에 과장된 액션연기를 폭발하는 순발력 덕에 단숨에 간판 배우로 떠올랐다. 시청자들에게 그의 얼굴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신 처용가'를 비롯해 자신을 너무 희화화했다는 이유로 한 패션 디자이너의 항의를 받았던 '앙드레 봉'등 50여편 모두가 그의 대표작이다.

소씨처럼 재연배우, 특히 주연급들은 대부분 연극무대에서 기본기를 익힌 사람들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다. 소씨와 함께 이번에 '타임머신'여우주연상을 받은 김량경(26.(右))씨가 그런 경우다. 김씨는 완전한 아마추어인 시청자 배우로 10회에 단발 출연했다 우여곡절 끝에 '타임머신'에 눌러앉았다.

평화방송 FD(촬영 진행 보조자)를 하던 2년 전 같이 일하던 작가 언니가 시청자 배우를 모집한다며 "한번 응모해 보라"고 권유한 것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평소 연기에 관심이 많던 김씨는 신청한 지 3개월 만에 얻은 출연 기회를 인생 역전의 계기로 만들었다.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또 다른 시청자 배우 한 명과 함께 못생긴 술집 작부 역으로 출연한 김씨는 이마로 바가지를 깨는, 정말 피 나는 연기로 PD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시키지도 않은 '무식한' 연기로 피까지 흘리는 그를 걱정하는 PD에게 한번 더 출연시켜 달라고 졸랐고, 그게 이번 여우주연상의 첫 단추가 됐다.

김씨는 버스 차장으로 나온 '굳세어라 금순아'와 드라마 '대장금'을 패러디한 '김장금' 등에서 주로 억세고 코믹한 아줌마 역할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평균 20%대를 유지할 만큼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타임머신'에 자주 출연하다 보니 소씨나 김씨의 인기는 웬만한 유명 연예인을 능가한다.

"유치원에 가면 인기 '짱'이죠. 애들보다 엄마들이 더 좋아해요. 아이들 시켜서 사인을 받아오라고 한다니까요."(소)

광고 출연 섭외도 들어오고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다음'에 팬카페가 생길 만큼 인기를 끌고 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은 어쩔 수 없다. 시청자의 사랑에 턱없이 못 미치는 관계자들의 인식이 서운하기도 하단다.

"미래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깬다니까요. 재연배우 영역이 좀 불안해야 말이죠. 재연배우 생활을 해봤던 연극계 선배들은 '경찰청 사람들' 이미지를 깨는 데 5년이나 걸렸다면서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두라고 말려요. 그러나 어떤 장르를 하느냐보다 어떻게 연기하느냐가 중요한 거 아닌가요."(소)

"시청자분들은 저희를 재연배우가 아니라 그냥 연기자로 봐주세요. 그런데 정작 방송 관계자들은 저희를 인정 안해줘요. 영화 오디션을 한번 보고 싶어도 '재연배우는 사절'이란 조항을 보면 굉장히 속상하죠. 게다가 주변에서 재연 프로그램도 급이 있는데 왜 하필 제일 망가지는 '타임머신'이냐며 말릴 때마다 기분이 안 좋아요. 하지만 제 코믹 캐릭터가 어딜 가나요. 어느 프로그램을 해도 전 이 캐릭터를 고집할 거예요."(김)

'타임머신' 연기는 늘 과장되고 우스꽝스럽다. 이런 정형화한 연기 패턴이 스스로 싫을 때가 왜 없을까.

"놀랄 땐 맨날 입을 크게 벌리고 두 손을 얼굴 가까이에 대거든요. 고민하고 연기를 바꾸면 PD선생님이 '그게 아니지, 원래 하는 거 그거 알잖아'라고 주문해요. 그럼 또 어쩔 수 없이 하던 대로 해야죠."

이들의 소망은 소박하다. 재연배우가 아닌, 그냥 연기자로 불리는 것이다. 연극이든, 드라마든, 영화든, 연기를 할 수 있는 모든 분야에 얼굴을 내밀고도 싶다.

"드라마 '야인시대'(SBS)의 구마적 역으로 이름을 널리 알린 연기자 이원종씨도 '경찰청 사람들'출신이고, 영화 '살인의 추억'에서 덜 떨어진 살인 용의자 백광호 역으로 나와 '향숙이, 예뻤다'라는 유행어를 만든 박노식씨도 '타임머신'출신이에요. 그 분들 보고 저희도 희망을 걸고 있어요."

이들의 바람대로 훗날 '타임머신'이 그들의 '매직타임'으로 기억될 수 있기를.

글=안혜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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