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서 노어 강의하는 43세 전화교환원|맨 주먹 쥐고 일군 교수 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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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전화교환원 윤경숙씨(43·한국통신국제전화교환)는 지난해부터 매주 화요일 광주 조선대에 출강하고 있다. 전화교환요령 따위를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다. 윤씨는 조선대 노어노문학과에서『노어강습』과『언어실습』두 과목을 맡아 지도하고 있다.
전화교환원과 대학강사.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일을 한 몸으로 해오기까지 윤씨에게는 적지 않은 사연이 있다.
지난 49년 서울 미아리에서 태어난 윤씨는 의류공장 등을 경영하던 아버지 덕에 당시 자가용을 타고 다닐 정도로 넉넉한 어린 시절을 보탰다. 그러나 그녀는 서울 정신여중 3학년에 다니던 해 이 의류공장이 화재로 문을 닫으며 하루아침에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암담한 처지가 됐다.

<장학생으로 여상에>
이듬해 1남2녀 중 맏이인 윤씨는 정신여고에 입학했으나 학비를 마련할 길이 없어 장학금을 탈만한 학교를 찾아 다시 시험을 치러야 했다. 중학교 때 공부를「꽤」잘했던 그녀가 대학을 포기하고 실업계 학교를 택한다는 것이 당시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공부를 계속해 유학까지 꿈꿨던 저에겐 작은 충격이었습니다. 밤새워 울기도 했지요. 그러나 어려운 살림살이에 달리 뾰족한 수도 없었어요.』
윤씨는 서울 동구여상을 수석으로 입학해 좌절감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고등학교 3년을 장학생으로 보낸 그녀는 졸업과 함께 H그룹에 여사원으로 입사했다.
『집안이 망하고 생계 때문에 취직하니 공부에 대한 한 같은 것이 생기더군요. 공부하겠다는 오기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더 깊어갔어요.』
윤씨는 이때 발동된 오기는「열심히 공부해 뭐가 되겠다」는게 아닌 막연한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오기로 윤씨는 일어·영어학원을 다녔다. 회화도 배우고 문법도 배웠다. 꼭 대학입학을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다. 두 동생 뒷바라지 때문에 대학에 입학한다 해도 다닐 수 있는 형편도 못됐다. 틈나면 시사주간지「타임」도 보고 소설책도 읽으며 여고시절 꿈꾸던 문학에의 갈증을 달래는 일도 그녀는 공부로 여겼다.
『집안살림 꾸리랴, 동생들 학비 조달하랴 정말 바빴지만 성기(39)와 명숙(36)이가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공부를 잘해 줘 그리 힘든 줄은 몰랐습니다.』

<두 동생 미 유학까지>
누이의 헌신적인 도움으로 남동생 성기씨는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현재 한국과학기술원 기계공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며, 동생 명숙씨 역시 미국에 유학해 석사학위 취득 후 현지에서 소설가로 활약하고 있다.
두 동생이 조금씩 자신들의 앞가림을 할 무렵인 지난 76년 윤씨는 한국통신교환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간단한 영어·일어·중국어회화를 익혀둔 것이 국제교환에 큰 도움이 됐다.
교환원으로 근무하면서 그녀는 식구들 몰래 대학입시를 준비했다.
『교대근무로 몸은 피곤했지만 오히려 확실한 시간을 내 공부 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뒤늦게 공부하는 모습을 가족, 특히 엄마가 보시면 마음이 아플 것 같아 숨겼지요.』
꾸준히 매일 4시간이상 대입준비를 해왔던 그녀는 81년 외국어대 노어과 야간에 합격했다. 친구들보다 15년쯤 늦은 셈이다.
『식구들 모두가 뛸 듯이 기뻐했지요. 저도 한풀이를 시작한 셈이지요.』그녀의 표현대로 대학입학은「시작」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쌓인 공부에 대한 한과 오기는 그녀에게 어느 샌가『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심어주었다. 윤씨는 86년 외국어대 대학원 노어과에 입학, 89년 내친걸음으로 졸업했다.
정신 없이 뛰다보니 윤씨는 혼기를 놓쳐버렸다.『결혼을 안 하려 한 것은 아니었는데…』라고 말꼬리를 흐리는 그녀는 이미 공부, 아니 학문과의 결혼으로 행복한 듯 웃는다. 그러나『아들·딸 낳아 잘 사는 친구들을 보면 솔직히 부럽다』고 심정을 밝히는 그녀에게 결혼은 여전히 열려진 문으로 보인다.
지난 7월1일 윤씨는「만학행로」에 작은 암초를 만났다. 외국어대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시험에 떨어진 것이다. 동생도 직장동료도 모르게 응시한 시험이었는데 고배를 들고 말았다.
『아직 부족한 탓이지요. 마음을 다잡고 더 열심히 해 꼭 좋은 결과를 내도록 하겠습니다.』

<결혼한 친구 부러워>
하루 한끼로 배를 채우는 악조건 속에서도 책을 놓지 않았던 윤씨는『살만해지니까 게을러진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며 자신을 질책했다. 윤씨는 소녀시절의 꿈을 살려 문학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전공인 러시아문학 쪽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내 논 것이 없어 부끄럽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정신대문제에 대한영문소설을 준비하는 동생에게 자료를 구해주며 그녀 자신도 언젠가 노어소설을 쓸 수 있으리란 희망을 가져보는 정도다.
윤씨는 현재 강단에 서고싶은 소망을 반쯤 이루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겨야 한다』는 교육을 수없이 받아왔다. 그녀는 남다른 학구열에 대해『이름 석자의 명예를 소중히 하라는 아버지의 교육영향도 켰던 것 같다』고 말했다.
윤씨는 국제교환원으로 직업에 충실하기 위해 틈나는 대로 여러 나라 언어를 익히고 있다.
전공인 노어는 물론 일어와 영어는「창피하지 않을 만큼」구사하고 중국어도 기초회화는 하는 정도다. 그녀는 또 89년부터 노조 일을 거들어오다 지난해부터는 한국통신 국제통신본부 노조위원장직을 맡아오고 있다. 동생들에서 동료노조원들로 뒷바라지의 대상이 바뀐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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