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 16. 박정희 전 대통령(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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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전 대통령(右)이 티잉 그라운드에서 동반자에게 먼 저 칠 것을 권하고 있다. [중앙포토]

박정희 대통령은 1966년 말 개장한 태릉컨트리클럽에서 골프를 자주 쳤다. 라운드 후에는 귀빈실에서 동반자들과 시간을 보냈다. 골프장에서 막걸리를 즐겨 마시던 박 대통령의 모습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막걸리와 골프장은 뭔가 좀 어울리지 않는 듯했지만 당시에는 어색한 장면이 아니었다.

박 대통령은 항상 큰 대접에 막걸리를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나서 다른 사람에게 "한 잔 받으시오"라며 빈 잔을 건넸다. 농부처럼 소박한 지도자 모습이었다.

언젠가 박 대통령이 "어떻게 해야 머리를 안 들지?"라며 '헤드 업'에 대해 물었다. 그 말을 듣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박 대통령에게 레슨을 하려고 하자 "한 코치가 잘 가르치고 있으니 당신들은 됐소"라며 물리친 적도 있다. 박 대통령은 또 내가 친 공을 보며 "시원하게 날아가는구만"이라며 감탄을 하기도 했다.

내가 "각하, 너무 힘을 많이 주시지 말고 부드럽게 친다는 마음으로 천천히 스윙을 하십시오"라고 조언하면 박 대통령은 웃으며 "한 코치는 빨리 치면서 왜 나한테는 천천히 치라고 하는 거야"라고 하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면 젊은 시절 나의 빠른 스윙이 부러웠던 것 같다.

박 대통령께는 마음놓고 레슨을 할 수도 없었다. 한 번은 필드에서 샷이 제대로 되지 않는 박 대통령에게 레슨을 했다. 그립과 스윙 자세를 바로잡아줬다. 그랬더니 늘 따라 다니던 고참 경호원이 내게 "각하께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말라"고 했다. 내가 "레슨을 하려면 가까이에서 자세도 잡아드려야 하는데 멀리서 하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그는 "몸을 만지거나 너무 가까이 다가서지 않도록 신경을 쓰시오"라며 거듭 주의를 줬다. 아니 가까이 가지 않고 어떻게 레슨을 하나. 그 뒤부터 의욕을 잃은 나는 레슨을 거의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라운드를 마치고 귀빈실에서 담소하던 박 대통령이 당시 이상국 태릉CC 전무에게 "이 장군, 내가 힘이 되어줄 게 없소?"라고 물었다. 30사단장 출신인 이 전무는 5.16 세력의 반대편에 섰던 인물이다. 그 바람에 구속돼 1년 이상 고생했지만 나중에 복권됐다. 이 전무는 박 대통령에게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 휴게소를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그 부탁이 효험이 있었던지 고속도로가 뚫리면서 추풍령휴게소는 그가 운영하게 됐다.

박 대통령은 나한테도 "한 코치, 뭐 필요한 거 없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런데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나는 "저는 됐습니다. 골프만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후진을 양성하려면 제대로 된 연습장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라고 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박 대통령이 지금 내게 다시 물으면 "프로골퍼들이 마음놓고 라운드를 할 수 있는 골프장을 하나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이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면 안 되는 것이 없던 시절이었다.

한장상 KPGA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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