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올린 「옥중결혼」/이하경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석간신문은 통상 오전 10시40분에 기사가 마감된다. 가판이 나오는 시간은 낮 12시10분 쯤이지만 가정에 있는 독자에게 신문이 배달되는 것은 오후 늦은 시간이 된다.
항상 시간과 싸워야 하는 기자는 사건의 전개과정이 빤히 보이는 경우 시제표기를 놓고 고심할 때가 많다.
지난달 30일 중앙일보 23면에 보도된 「사노맹총책 백태웅씨 옥중결혼」 기사는 바로 그런 경우였다.
검찰이 이날 오후 2시 백씨와 약혼자를 특별면회 형식으로 만나게 해 혼인신고서에 도장을 찍게 하고 가족들에게도 통보,이 자리에 참석케 한다는 사실은 여러 루트를 통해 거듭 거듭 확인한 내용이었다. 따라서 기자는 가정독자가 신문을 받아볼 때쯤엔 두 사람이 이미 「부부」가 돼있을 것이란 확신을 갖고 완료형 시제를 썼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날 옥중결혼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결혼기사를 기자가 완료형으로 쓴데 대한 질책은 면할 수 없음을 통감한다.
그러나 이날 낮 중앙일보 가판이 배포된뒤 상황이 돌변,결국 옥중결혼에 제동이 걸린데는 검찰 나름대로 딱한 사정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적단체 수괴에게 검찰이 결혼을 주선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란 논리가 등장했고 「사상투쟁의 일환이다」「그래서 윗분이 진노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맞는 이야기다. 백씨는 공안기관 말대로 남로당이후 최대규모인 사회주의혁명 지하조직 총책이다. 따라서 그의 사상에 동정을 보내거나 행동을 미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당초 우리는 잘못된 이념의 틀에 스스로를 묶어두고 그릇된 길을 살아온 젊은이들에게 검찰이 당사자와 가족이 간절히 원하는 결혼을 주선함으로써 순화­선도(양형은 별개다)의 길로 이끌려한데 주목했었다.
바로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의 강점이며 자신감의 표현이라고 본것이다.
따라서 검찰 내외로부터 『성급히 보도하지 않았더라면 조용히 일이 성사됐을텐데…』라는 「원성」을 듣는 기자로선 검찰의 의연하지 못한 결정에 유감을 표시하지 않을 수 없다. 수사기간중 두차례에 걸쳐 눈물의 상봉을 했던 백씨와 약혼자는 이날 결혼을 위해 소환됐다 먼발치에서나마 서로의 얼굴도 보지못한채 구치소로 발걸음을 되돌렸다.
검찰의 「결혼」통보를 받고 마음이 부풀어 수의입은 결혼일망정 자식들의 앞날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양초·수박을 들고 검찰에 나왔던 양가 가족들도 땅이 꺼지는 한숨을 쉬면서 헤어졌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