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과 사회변동』 심포지엄|중앙일보사 한국사회학회|「6·25」후유증 반작용|『지역사회의 갈등』 <정근식·전남대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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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한국전쟁 이전 지역사회 갈등의 주요 원인은 좌우대립이었다. 47년 메이데이 투쟁이후 좌우익간에 유혈충돌이 전개되며 이해 10월 좌익인사들에 대한 대대적 탄압과 체포가 진행됐다. 48년에 이르면 심한 탄압으로 인해 일제하에서부터 활동했던 좌익운동가들의 이탈이 늘어난다. 좌익색출에는 전향한 인물들을 이용하는 예가 많았다.
이 점은 지방사회 내부의 시민 사회적 요소와 정상적인 사회관계 형성에 엄청난 악영향을 끼쳤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지방사회에서의 갈등양상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사례는 여순 사건이다.
14연대 병력이 여수를 점령한 이후 재조직된 여수인민위원회의 6개 과업을 보면 당시 사회적 갈등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정치적 숙청 ▲친일파·모리배의 예금동결과 재산몰수 ▲적산가옥과 수탈된 가옥의 재분배 ▲매판자본가 사업장의 운영권박탈 ▲쌀 배급 ▲무산대중에 대한 은행대출 등이었다.
또 국군이 여수를 회복한 후 벌인 부역자 색출과 잔인한 처벌이 지역공동체를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
특히 허위제보에 기댄 부역자 색출은 지역사회의 공동체적 일체감은 물론 타인과의 사회적 관계 자체를 파괴시켰다.
49년 9월 공세 이후 군경이 빨찌산 토벌을 위해 농가를 소개시킨 것도 전통적인 마을공동체 해체에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한국전쟁 기간중 지방사회의 갈등은 우익의 보도 연맹원들에 대한 대규모 처형이 부채질했다. 이것은 보복의 상승작용을 낳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 정권은 남한에 남아있던 좌익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49년 6월 국민보도연맹을 조직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그 수가 30만 명으로 늘어났는데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상당수의 보도 연맹원을 체포, 후퇴 시 이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한 것이다.
한편 북한군의 점령 초기 우익에 대한 본격적인 처형은 매우 중요한 우익인사를 제외하면 상당히 통제됐다. 그러나 북한군 후퇴 시 당과 인민위원회의 통제가 무너지면서 우익에 대한 처형이 지역출신 좌익들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자행되었다.
50년 가을 이후에는 우익의 좌익에 대한 일방적 억압이 진행된 시기였다. 이승만 정권은 여전히 「북진통일론」을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동원했다. 이런 상황의 연장 속에서 실시된 56년의 제3대 대통령선거는 한국전쟁의 영향을 평가하는데 상당한 의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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