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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농자천하지대본' 버려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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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기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20여년 전. 학교에선 도시락 검사를 했다. 쌀밥 도시락을 싸 오면 선생님께 혼이 났다. 쌀이 모자라 혼식을 장려하던 때였다. 요즘은 도처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쌀밥 그림이 걸려 있다. 쌀 소비를 촉진하기 위한 이런 포스터에도 불구하고 쌀 소비는 자꾸 줄고 쌀 재고량은 늘어나고 있다.

국내 쌀값이 국제 시세의 네 배나 되는 상황에서 수출은 쉽지 않다. 하지만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품질 좋은 쌀을 재배하고 마케팅에 팔을 걷어붙이면 쌀 수출도 마냥 꿈이 아니다. 배곯던 시절에 만들어진 양곡관리법에 발목 잡혀 해방 이후 최초의 쌀 수출이 좌절될지 모른다는 보도는 그래서 의미가 깊다. <본지 5월 8일자 1면>

낡은 양곡법이 개방시대를 맞아 수출길을 개척하는 한 농민의 열정과 희망을 꺾어서는 안 된다. 이런 점에서 농림부가 뒤늦게나마 쌀 수출을 승인하기로 한 것은 다행스럽다. 사실 그동안 우리 농업은 너무 오래 보호주의 온실에 갇혀 있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 보도가 농업 관련 분야의 낡은 법령을 재정비하고 농림부의 의식이 바뀌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말레이시아에서 한국식품 도매상을 경영하는 이마테오(38). 그는 "외국에서 우리 농산물이 통하는 시장은 분명히 있다"고 단언한다. 한국산 휴대전화.자동차가 일류로 자리 잡으면서 한국 농산물에 대한 이미지도 몰라보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농림부도 농업 보호에서 벗어나 세계시장 개척에 욕심을 내 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낡은 깃발부터 내려야 한다.

'고시히카리'는 일본말 고시(밥의 찰기)와 히카리(밥의 윤기)의 합성어인데 어느새 최고급 쌀을 지칭하는 일반명사가 됐다. 한 포대에 100만원이 넘는다. 값은 둘째치고 물량이 귀해 미국.유럽.한국에 암시장이 형성될 정도다. 일본 정부는 니가타(新) 지방에서 재배되는 고시히카리를 구별하기 위해 따로 유전자칩까지 개발해 냈다.

그러나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고시히카리는 니가타보다 남한이 재배에 더 적당하다고 한다. 위도는 비슷하지만 니가타는 강수량이 너무 많고 갖가지 병충해에다 대형 태풍도 잦다. 그런데도 일본은 3~4년 전부터 쌀 수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쌀도 희망이 있다. 다만 그것을 농림부만 일부러 모른 척하는 것은 아닐까.

박혜민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