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은 따로 놀고 아내는 갈수록 불만

중앙일보

입력 2007.05.03 04:43

업데이트 2007.05.03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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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한국의 40, 50대 아버지들의 어깨가 갈수록 처지고 있다. 부모와 자녀를 부양하기 위해 짊어진 짐이 너무 무겁다. 직장에서는 치열한 경쟁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고 가정에서는 일에 쫓겨 좋은 남편.아버지 역할을 하기가 버겁다. 건강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온 가족이 아버지의 제자리를 찾아줘야 한다.
은행 지점장을 하다 2004년 퇴직한 조민석(54.가명.경기도 고양)씨는 1억5000만원의 퇴직금이 2년여 만에 거의 바닥났다. 폐암 투병을 하다 올해 초 숨진 어머니 치료비로 조씨는 8000만원 가까이 썼다. 병원에서 가망이 없다고 했지만 마지막까지 민간 요법에 매달리느라 치료비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조씨는 "자식 된 도리로 차마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대학생인 두 아들의 등록금과 사교육에도 한 해 수천만원이 들어간다. 조씨는 "대학 들어가면 사교육은 끝이려니 했는데 해외 어학연수는 필수라고 해 노후자금용으로 준비했던 적금마저 깨야 할 판"이라며 "이제 남은 건 집 하나뿐"이라고 말했다. 답답한 마음에 조씨는 혼자 술 마시는 날이 늘었다. 친구들을 불러내 하소연하기도 낯부끄럽다. 살림살이가 빠듯해지자 아내는 아내대로 짜증이 늘었다. 조씨는 "뭘 바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다 퍼주고 내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에 울컥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한국의 40, 50대 아버지들은 자녀 교육과 부모 부양에 허리가 휘더라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부인의 불만은 40대를 넘어서면서 급격히 늘어난다. '남자다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속 시원하게 털어놓지도 못한다.

◆ 부양 부담 큰 '4050'=2006 한국종합사회조사(KGSS)에 따르면 '이혼하고 싶어도 자녀가 다 클 때까지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남성(59.4%)이 여성(53.6%)보다 높았다. 가족을 지키려는 생각이 여성보다 더 강한 것이다. 고지영 성균관대 교수는 "사회생활에 몰두하던 남성들이 가족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국의 아버지가 가족을 위해 짊어지고 있는 짐은 너무 무겁다. 특히 40, 50대 가장은 부모와 자녀를 부양하는 부담이 크다.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가 경제적 지원의 강도를 0(전혀 지원하지 않는다)~10점(매우 자주 지원한다)으로 수치화해 보니 '4050 세대'는 성인(만 18세)이 된 자녀에게도 평균 7점의 경제적 지원을 하고 있었다. 노부모에 대한 지원은 5.6점이었다. 반면 이 세대가 부모나 자식 세대로부터 받는 경제적 지원은 각각 3점대에 그쳤다. 돈이 들지 않는 정서적인 면에서도 4050세대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훨씬 많다.

정병은 성균관대 교수는 "낀세대인 40, 50대들은 위아래 세대를 돌보는 부담을 거부하지 않고 떠안지만 정작 자신들이 받는 것은 적다"며 "사실상 가족 복지의 보루이자 사회안전망 역할을 담당하다 보니 고달플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외톨이 아버지=회사원 최인구(43.가명)씨는 최근 거래처 직원을 접대하고 오후 10시쯤 집 근처 가게에 들러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샀다. 중3 딸아이 생각이 나서다. 집으로 가는 5분 남짓한 시간, 아이가 좋아할 모습을 떠올리며 최씨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기대는 산산조각이 났다. 엄마와 거실에서 얘기하고 있던 딸아이는 최씨가 들어오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까지 따라가 케이크를 내밀었지만 아이는 "아빠, 술 냄새 나"라며 고개를 돌렸다. 최씨는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로 딸아이가 살갑게 대해 준 게 별로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이들뿐 아니다. 한국의 아버지들은 40대에 접어들면서 아내의 불만에 시달리게 된다. 20~30대에서 60%대였던 기혼 여성의 결혼 만족 비율(매우 만족, 다소 만족)은 40대 들어 46%로 뚝 떨어진다. 60대에는 만족도가 28%에 불과했다.

결혼생활 31년째인 주부 박모(54)씨는 "우리 세대는 집안일은 여자 몫이라 생각하고 남편에게 집안일을 요구하지는 않았지만 몸이 아파도 도와주지 않을 때는 야속하다"며 "가사 분담을 당당하게 요구하는 젊은 주부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이런 불만은 황혼 이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총 이혼 건수는 최근 줄어드는 추세지만 지난해 55세 이상의 이혼은 1만2900건으로 10년 전에 비해 3.5배나 늘었다.

그러나 아버지들은 이런 스트레스를 털어놓지 못하고 혼자 짊어지고 간다. 40, 50대 기혼 여성 10명 중 3명은 "남편이 나(아내)에게 고민을 털어놓지 않는다"고 답했다.

◆ 특별취재팀=염태정(경제부문), 김영훈.김은하(사회부문), 박종근(영상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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