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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평가받는 '일본식 경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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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하지만 현실은 냉엄했다. 미국식을 앞장서 도입한 소니가 곤두박질친 반면 일본식을 고집한 도요타.캐논이 약진했다. 지난해 일본 경제의 회생을 총괄하면서 당시 일본 게이단렌(經團連) 회장 오쿠다 히로시는 그 동력을 일본적 경영에서 찾았다. 그간의 기업실적 개선은 연구개발과 인재육성의 성과인데 이는 단기적 이익과 인원 삭감을 중시하는 미국식 경영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실제 극심한 불황과 구조조정을 거치면서도 일본의 평균근속연수는 90년 10.9년에서 2006년 12.0년으로 오히려 늘었다. 매출액 상위 100대 기업의 평균근속연수가 11.8년에 불과한 우리로서는 부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본적 경영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돌이켜 보면 90년대는 우리와 일본 모두에 전환을 강요한 시기였다. 세계화라는 환경변화와 내부 시스템의 기능부전은 한쪽에는 '잃어 버린 10년'을, 또 한쪽에는 외환위기를 초래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양자의 대응방식은 사뭇 다른 것이었다.

여기 그 차이를 보여 주는 흥미로운 데이터가 있다. 외환위기를 전후한 96년에서 2001년까지 한국은 노동분배율(기업의 부가가치 중에서 인건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63%에서 59%로 떨어졌다. 종업원에게 구조조정의 리스크를 부담시키고 기업이익을 우선하는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한 것이다.

같은 시기 일본은 노동분배율이 73~75% 선에서 움직였다. 그런데 이는 이전 호황 때의 70% 전후보다 매우 높은 수준이다. 즉 일본은 불황기에 기업이익을 희생하면서 종업원의 리스크를 감소하는 방법으로 구조조정을 이룬 것이다.

처음에는 한국적 방식이 부러움을 샀다. 경영자의 결단력과 주주를 배려한 신속한 의사결정이 기업의 수익성 개선에 기여한다는 평가였다. 일본 내에서도 스피디한 의사결정만큼은 한국을 본받아야 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하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는 논리가 점차 힘을 얻기 시작했다. 우선 종업원이 일본 기업의 가장 큰 자산이라는 점이 강조됐다. "종업원 목을 자를 판이면 차라리 할복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 경영자 내에서 터져 나왔다. 한편 단기적 실적 외에 장기적 성장 또한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컨센서스도 이루어졌다. 실제 일본 기업은 불황 속에서도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연구개발 투자를 유지했다.

이미 일본에서 미국식은 '글로벌 스탠더드'가 아니다. 최근 조사에서 경영자의 7할은 기업의 주인으로 주주와 함께 종업원을 꼽았다. 일본적 경영이 재평가받는 것도 바로 이 점 때문이다. 종업원 중시와 장기적 투자가 일본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다. 종업원 중시→인적자원의 축적→신제품.신기술 개발→장기적 성장의 논리다.

우리는 어떤가. 일본과 달리 우리는 여전히 '글로벌 스탠더드'에 두터운 신뢰를 보내고 있다. 하지만 미국식 경영이 우리 현실에 맞는다는 보장은 없다. '사오정'과 '양극화'는 그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자본집약적인 미국과 달리 우리는 노동집약적인 원리로 성장을 이루어 왔다. 앞으로도 인적자원 하나만으로 성장을 일구어 나가야 한다. 새로운 기회의 제공으로 소득불평등을 완화할 수 있는 미국과 달리 우리는 기회 자체도 매우 적다.

그렇다면 선택은 두 가지밖에 없다. 미국식 경영에 집착한다면 주주 중심주의가 어떻게 광범한 인적자원의 활용과 소득불평등 완화를 이끌어 낼 수 있는지 비전을 밝혀야 한다. 그게 어렵다면 이제라도 우리 현실에 맞는 '한국적 경영'을 모색해야 한다. 시기를 놓치면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은 매우 어렵게 될 것이다.

우종원 일본 사이타마대 교수·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