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퍼붓고 장비 유지비도 못 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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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김해시 주촌면에 있는 경남 테크노파크 정밀기기센터 가건물. 이 건물에 있는 열표면처리 특성평가장비는 지난해 말 1억9000여만원을 들여 설치했지만 이용 실적이 매우 저조한 상태다. 본 건물은 인근 부지에 지난달 20일 착공했다. 김해=송봉근 기자

정부 사업 가운데 '지역'이란 표현이 들어간 경우 한결같이 두 가지 공통점을 지닌다. 하나는 사업 규모가 걷잡기 어렵게 커져 버리고, 또 하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세금 잡아먹는 하마로 둔갑한다는 점이다.

테크노파크(TP) 사업도 마찬가지다. 이상룡 경북대 교수는 "외국은 처음 한두 개 TP가 성공하면 다른 지역은 이를 벤치마킹하는 전략을 폈다. 좁은 국토에 이렇게 많은 TP를 한꺼번에 만든 것은 우리나라가 처음"이라고 지적했다. 한꺼번에 추진하다 보니 경쟁력이나 효율성이란 핵심 개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균형발전'이란 껍데기만 남았다는 것이다. 사업 중복으로 예산 낭비는 피할 수 없는 수순이 돼 버렸다.

◆ 첫 단추부터 잘못 낀 TP=정부는 원래 6개의 TP만 하기로 했다. 1998년 경북.광주.대구.인천.경기.충남 등이 먼저 지정됐다. 시범적으로 해보고 성공하면 다른 지역에 확산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한 TP당 5년간 250억원씩, 총 1500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지자체가 나머지 절반을 대는 매칭펀드 형식이었다. 그러자 소외된 지자체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산업자원부도 여기에 동조했다. 결국 다른 시.도에도 한 개씩 설립해 주는 쪽으로 방향이 바뀌었다. 기획예산처는 "처음 약속과 다르다"며 반대했지만 소용 없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부산.포항 등 8개의 TP다. 대신 정부는 이들 후발 TP에 대해서는 선발 TP의 절반 금액만 지원하기로 했다. TP당 5년간 125억원씩, 총 1000억원의 예산을 배정했다.

지역별로 4개씩 업종을 선정해 정부가 지원하는 지역전략산업진흥정책도 마찬가지였다. 90년대 말 부산(신발).대구(섬유).광주(광산업).경남(기계) 등 4개 지역의 특정 산업만 정부가 돈을 대 진흥하기로 했다. 그러자 지자체와 해당 지역 국회의원들이 반발했다. 결국 수도권만 제외한 나머지 9개 시.도도 전략산업을 지정하면 정부가 지원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산업도 한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났다. 전략업종을 선택해 확실히 키우겠다는 선택과 집중 전략이 무차별 선심성 정책으로 둔갑해 버린 것이다.

지금까지 산자부가 TP 사업단 지원 명목으로 공개한 금액은 2007년까지 모두 8365억원. 이 밖에 중앙정부가 TP 등 각종 지역혁신사업을 위해 쓴 돈은 5조9900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산자부는 TP 사업단 이외에 지역의 전략산업을 기획하는 전략산업기획단, 그리고 지역별로 3~4개 전략산업을 육성하는 특화센터 등 TP의 다른 부문 예산은 공개하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경남 TP의 사업비는 모두 6200억원. 경남 TP가 후발인 점을 감안하면 14개 TP의 전체 사업비는 줄잡아 10조원 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

◆ 뒤늦게 수습에 나선 정부=사실상 TP를 방치해 오던 산자부가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 지난해부터. TP를 시작한 지 7~8년 만의 일이다. 산자부는 지난해 12월 '지역산업 지원사업 조정.연계방안'이란 대외비 보고서를 작성했다. 산자부가 추진 중인 각종 지역균형발전사업도 중복 지원에 따른 낭비가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산자부의 수술도 시작됐다. 지난해 말 '산업기술단지 지원에 관한 특례법'을 개정해 TP 원장이 TP를 대표하도록 했고, 올해는 이사회 구성과 원장 임면에서 지자체의 입김을 덜 받도록 할 생각이다. 산자부 강혜정 팀장은 "TP를 지자체로부터 독립시켜 제3섹터로 만들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으로 산자부는 TP와 기술혁신사업 등 모두 9개의 사업을 4개로 묶을 계획이다. TP와 클러스터도 합칠 방침이다. 지역균형발전 사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예고하는 것이다.

◆ 앞으로가 더 문제=산자부는 1기 TP(2003~2007년)에 이어 2기 TP 로드맵을 만들고 있다. 이를 위해 TP당 40여억원씩, 총 600억원을 지원하기로 하고 기획예산처와 협의 중이다. 그러나 TP가 요구하는 금액은 훨씬 많다. 각 TP는 최근 산자부에 200개 정도의 사업을 제안하면서 총 7000여억원의 정부 지원을 요청했다. 한 TP 원장은 "확실한 기술을 개발해야 자립할 수 있는데, 정말 요원한 일"이라고 말했다.

TP는 신기술 기업을 많이 창업시켜 보유 지분만큼 배당을 받아야 자립이 가능한데 이게 쉽지 않다는 설명이다. 그는 "솔직히 자립이 아니라 지금까지 도입한 고가 첨단 장비의 감가상각비를 대기도 힘든 실정"이라고 털어놓았다. 정부도 딜레마에 빠졌다. 계속 지원하자니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되기 십상이고, 지원을 끊으면 그동안 투자한 게 다 고철 더미가 돼 버리기 때문이다.

김영욱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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