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경영 능력 검증 아직도 머나먼 길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7호 18면

정의선(37ㆍ정몽구 현대자동차 회장 외아들) 기아자동차 사장은 몇 년 전 대구에서 회식을 했다. 인근 영업점 직원들과 자리를 함께했다. 당시 K부장은 현대차 영업점에서 유행하던 일명 ‘충성주(酒)’를 바치겠다고 했다. 충성주란 맥주잔 위에 젓가락을 놓고 그 위에 소주잔을 놓은 다음 이마로 상을 내리받아 그 충격으로 소주잔이 맥주잔 속으로 빠져 만들어지는 폭탄주다. 그 제조법을 들은 정 사장은 “그런 거라면 당연히 제일 나이가 어린 제가 올려야 한다”면서 충성주를 직접 만들어 돌렸다. 이뿐이 아니라 술병을 들고 수십 명의 지점장들 자리로 찾아가 일일이 술을 부어주며 “고생이 많다. 잘 부탁한다”고 인사를 했다.

FOCUS 기아차 위기론에 잠 못 이루는 정의선 사장

당시 기자는 두 달 남짓 현대차 전국 영업점을 돌며 취재한 일이 있었다. 그때 만난 K부장은 가까이에서 접한 정 사장 얘기를 생생하게 들려줬다. 정 사장은 상무 시절 경영수업차 현대차의 영업본부를 순회했다. 회장 아들이 내려온다는 통보를 받은 K부장은 서둘러 인근 고깃집에 저녁 회식자리를 예약했다. 그런데 식당 앞에서 K부장은 정 사장을 수행한 한 임원으로부터 핀잔을 들었다. “점심도 고깃집에서 했는데 저녁까지 그러면 어떡하느냐”는 것이었다. 당황한 K부장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정 사장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부장님 괜찮습니다. 저 고기 좋아합니다. 두 끼나 고기를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30대 초반의 청년이긴 해도 직급이 상무이고 회장 아들인데 의외로 겸손한 정 사장의 태도에 K부장은 물론 함께 있던 십수 명의 지점장이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난해 현대차그룹 비자금 사건 때 계열사인 글로비스에 연루된 것 이외에 정 사장이 이렇다 할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다. 오히려 정 사장을 가까이에서 본 임직원은 하나같이 “오너 2세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겸손함을 지녔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한 인사는 “아버지 정몽구 회장보다도 더 의리파”라고 평가했다.

이같이 정 사장의 사람 됨됨이 얘기는 흘러나오지만 경영자로서 능력이 있는지 여부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시장에서는 그가 기아차 사장으로 부임한 뒤 실적이 악화한 것을 두고 책임론까지 제기되고 있다. 현대차가 인수한 1999년부터 2005년까지 흑자를 이어가던 기아차는 지난해 1200억원대의 적자를 냈다. 지금은 현대차에까지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기아차 주가는 반토막이 났고, 현대차 주가도 곤두박질했다. 급기야 시가총액 기준 10위권 밖으로 밀려나는 수모를 겪는 최악의 상황이다. 환율과 노조 문제 때문이라고는 해도 경영자가 면책받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아직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후계자를 너무 빨리 사장으로 내보내 기아차 경영이 악화됐다는 지적도 있다. 정몽구 회장은 지난해 무리해서 아들에게 지분을 만들어주려다가 현대차 사태를 불러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정말로 기아차 경영 악화에 정 사장의 실책이 있는 것일까.

현대차의 P임원은 “사장이라고 기아차 경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현대차 그룹의 결재시스템을 모르는 것”이라고 일축했다. 그룹 내의 어떤 사장도 정몽구 회장 결재 없이 재량권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이다. P임원에 따르면 그룹 내 모든 결재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해당 사업본부장(대부분 부사장급)이 직접 정 회장에게 받는 시스템이다. 서명(사인)하는 법이 없는 정 회장이 도장을 ‘쾅’ 찍는 것으로 모든 게 결정된다. 심지어 부대행사같이 비교적 가벼운 사안도 외주업체 사장이 서류를 들고 회장실에 들어갈 정도라고 한다. 지난해 현대차 사태 때 정 회장이 혐의를 피해갈 수 없었던 것도 바로 그 도장 때문이었다. 이런 의사결정 구조에서 정 사장이 소신있게 경영을 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얘기다. 기아차 경영 악화의 책임을 정 사장은 물론 공동 대표이사인 조남홍 사장에게조차 묻기 힘들다는 얘기다.

정 사장이 경영상 거의 부각되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아버지인 정 회장이 철저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정 회장은 그룹 내 누구도 정 사장의 얘기는 입도 뻥끗하지 못하도록 단속한다. 최근 기아차 슬로바키아 공장 준공식 때 기아차 대표인데도 정 사장이 거의 부각되지 못한 것도 그래서다. 정 회장은 공식 행사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정 사장은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착공 후 2년 넘게 두 달이 멀다 하고 현지로 날아갔던 정 사장이었다. 기아차 슬로바키아 준공식 테이프 커팅 행사와 유로 2008 후원계약서에 서명하면서도 정 사장은 한마디 말 없이 지켜만 봤다. 그러고는 서둘러 귀국했다. 소탈한 정 사장이지만 아버지 옆에선 없는 듯 조심한다.

2년이 넘는 동안 정 사장은 기아차 사장으로 무슨 일을 한 것일까. 정 회장은 정 사장을 기아차로 보내면서 슬로바키아 공장을 비롯해 중국 제2공장(상반기 완공 예정), 미국 조지아 공장(2009년 완공 예정) 건설에 매진하도록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사장은 지난해 12월 슬로바키아 공장을 방문해 ‘씨드’ 1호차 양산식과 품질결의대회를 주관하기도 했다. 모두 현재의 실적과 관계없는 것들이다.

아버지 정 회장이 품질경영으로 승부를 걸었다면 아들 정 사장은 디자인에 주목하고 있다. 그는 측근들에게 “현대차와는 다른 기아차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피터 슈라이더를 디자인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한 것도 정 사장이다. 슈라이더는 크리스 뱅글(BMW), 월터 드 실바(아우디)와 함께 유럽 3대 카 디자이너에 꼽히는 명장으로 독일연방디자인대상(4회)과 시카고 굿디자인상(2회)을 휩쓸었다. 당시 정 사장은 “슈라이더 영입으로 기아차 디자인이 보다 혁신적이고 창조적으로 도약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신차 ‘씨드’가 정 사장의 첫 시험대

올 초 공개된 컨버터블 컨셉트카 ‘익씨드’도 기아차의 색깔 찾기에 나선 정 사장의 공이 컸다. 최근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출품된 컨셉트카 ‘큐(Kue)’도 크라이슬러의 낫소, 지프의 트레일호크 등과 함께 디자인대상을 받았다.

정 회장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크다. 선친인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가장 아끼던 손자였기에 더욱 그렇다. 정 명예회장은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정 사장에게 어떤 일을 맡길지 고민이 많았다. 정 회장이 “아직 어려니 조그만 사업체부터 맡기려 한다”고 하자, 정 명예회장은 “크게 될 놈이니 처음부터 현대차의 구매담당으로 임명한다”며 반대했다. 또 현대차 사태 때 “아들 대신 감옥에 갔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 회장의 부성애는 지극하다. 불도저 같은 성격의 정 회장이 정 사장에게 당장 책임질 일을 맡기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자신의 그늘에 두고 계열사를 두루 섭렵하도록 하는 것도 아들이 행여 다칠 것을 염려해서라는 귀띔이다. 한 인사는 “정 회장은 손자들이 집에 오는 날이면 행여 다칠세라 손수 식탁이나 책상 모서리를 테이프로 감쌀 정도로 내리사랑이 끔찍하다”고 귀띔했다.

하지만 정 사장은 아버지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그는 그룹의 위기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장인인 정도원 삼표산업(옛 강원산업) 회장과 자주 만나 경영상 조언을 많이 듣는 것으로 알려졌다.

몇몇 인사는 그가 능력 있는 인재들이 그룹을 떠나는 것에 안타까움을 표시했다고 전한다. 그는 퇴직한 인사들을 찾아다니며 그룹에 도움이 될 만한 고견을 듣고 싶다고 했다. 그때마다 정 사장은 “내 방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며 “회사를 떠났어도 언제든 만나서 얘기하자”며 포용력을 보여줬다고 한다. 지난해 정 회장이 구치소에 수감돼 있는 동안 쓸쓸한 마음을 달래려고 원로들을 만나 저녁을 대접하면서도 “약주 한잔 모셔야 하는데 부친이 저러고 계시니…. 일찍 가는 것을 양해해 달라”며 돌아섰다고 한다. 아버지인 정 회장이 지난해 비자금 사건으로 공판을 앞두고 있는 현재 정 사장도 ‘마음의 감옥’에 있다는 얘기다. 당시 함께한 원로는 “그가 아직 젊기는 하지만 그룹을 맡아도 될 만큼 넓은 가슴을 가졌다”고 전했다.

정 사장은 99년 현대차 구매담당 이사로 입사해 8년 동안 기획ㆍ마케팅ㆍ영업 부문을 비롯해 해외 프로젝트까지 두루 거치며 경영수업을 받았다. 그에게 최근 준공한 슬로바키아 공장은 첫 작품이자 실험무대다. 이 공장이 성공해야 기아차의 국면 전환이 가능하다. 정 사장은 지난해 여름 ‘비전 추진팀’이란 조직을 신설해 현대차와 차별화 전략을 세웠다. 그는 야심작 씨드에 승부를 걸고 있다. 올해 유럽지역 광고비의 50%를 씨드에 몰아넣을 생각이다. 유럽지역의 딜러를 100개 더 늘려 판매망도 확충한다는 전략이다. 정 사장은 “씨드는 성능과 디자인으로 유럽에서 경쟁 차종을 제치고 정상에 우뚝 설 것”이라고 자신감을 보였다. 자신감만큼 중압감도 크다. 하지만 어느 아버지도 외아들을 벼랑에 떨어뜨려 능력을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 회장은 기아차 위기론에 대해 “기아차는 아무 걱정할 것 없다”고 일축했다. 정 회장은 정 시장이 최대한 빨리 그룹의 모든 업무를 섭렵하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그가 현대제철을 자주 시찰하는 것을 두고 조만간 제철을 맡지 않을까 점치는 이들도 있다. 현대제철을 맡을지, 현대모비스를 맡을지, 아니면 떠 빨리 그룹으로 들어와 실권을 잡을지는 아버지인 정 회장이 판단할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팎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게다가 정 사장을 견제하는 세력이 있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고 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