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와 도덕성… 노블레스 오블리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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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호 26면

같은 장소에서 하루 만에 가장 많은 군인이 죽은 전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솜(Somme) 전투가 꼽힙니다. 전투 첫날인 1916년 7월 1일 하루 만에 영국군 2만 명이 죽고 4만 명이 다쳤습니다. 솜강 주변 평야에 50cm 간격으로 병사들이 쓰러져 있었다고 합니다. 솜이 남긴 역사적 교훈은 전쟁의 참혹함과 숭고한 자기희생의 대비입니다.

숭고한 자기희생 가운데서도 영국인들이 특히 자랑스러워하는 대목은 이날 전투 참가자 전원이 자원병이라는 사실입니다. 물론 당시엔 징병제였기 때문에 진짜 군인들은 따로 있었죠. 그리고 솜 전투의 장렬한 스토리를 만들어내고 또 기록한 영웅들이 대부분 명문 학교를 다니던 귀족 가문의 자제들이란 점을 영국인들은 더 자랑스러워합니다. 당시 총리와 야당 당수의 아들은 물론 명(名)재상 글래드스턴의 손자인 현역 의원까지 자원해 전사했습니다. 시인 에벌린 워는 이들의 참전 동기를 “특권을 누리는 데 따른 사회적 책무를 다한다는 명예를 지키기 위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들을 움직인 사회적 책무는 평화에 대한 사랑과 애국심이었습니다. 전형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정신입니다.

인간은 존엄하다는 점에서 모두 평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불평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는 사람이 노블레스고, 이들이 상대적으로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돌려주는 보상적 행위가 오블리주인 셈이죠.

우리나라엔 노블레스, 즉 귀족이 따로 없습니다. 하지만 정치·경제·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위 ‘지도층’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한국의 21세기 노블레스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혜택에 걸맞은 오블리주, 즉 사회적 책무를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많이 받아왔습니다.

아들을 위해 직접 폭행에 나선 것으로 알려진 한화 김승연 회장은 그가 누리는 영향력이나 부(富)로 미루어 분명 우리 사회의 노블레스이겠죠. 유감스럽게도 그가 보인 행동은 오블리주와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노블레스의 오블리주엔 보통 사람보다 엄격한 도덕성도 포함돼 있습니다. 모두 명예를 지키기 위한 자기희생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합니다.

오블리주는 어디까지나 도덕적 차원의 의무이기에 누가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보통 사람들이 노블레스들을 존경함으로써 사회적 압력을 만들어낼 수는 있겠죠. 그러나 노블레스들의 오블리주가 먼저 있어야 맞습니다. 노블레스는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도층이니까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불평등한 세상을 훈훈하게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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