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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송의 드로잉 에세이-벌레와 목수<1>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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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18면

입 큰 물고기 김진송 작, 은행나무 

나무 작업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벌레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가깝게? 그렇게 말할 자격이 나에게 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벌레와 가까운 사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벌레를 들여다보고 녀석들이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 무얼 하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꼼꼼히 살펴보기라도 했어야 했다. 벌레에 대해서는 사실 관심조차 없었다. 지레 질겁하여 멀찌감치 밀쳐놓기만 했다.

나무 구멍을 파고든 은둔자, 벌레

나무 작업을 하면서 등장하는 벌레는 일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들이다. 벌레는 내 곁에 늘 머물러 있었지만 결코 나와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없다. 아마 내가 벌레를 조금 덜 징그러워했거나 벌레가 덜 징그러웠다면 나의 사정도 조금은 달라졌을지 모르겠다. 벌레들을 무수히 만나지만 나는 벌레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그대로 대패로 밀어버리거나 나무토막째 내던져 버리곤 했다. 벌레는 살점이 뜯겨 죽어 버리거나 내동댕이쳐져 움직이지도 못한다. 징그러운 벌레들! 그런 벌레를 애써 외면하는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다. 그 후로 내 행동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벌레가 등장할 때마다 잠깐 벌레를 살펴보는 버릇이 생겼다.

꿈틀거리는 벌레를 아무렇지도 않게 들여다보는 생물학자들이 존경스럽다. 그들은 세상의 수많은 종을 분류해 내고 생태와 습성에 대해 연구한다. 꽃이나 벌레를 보고 식물도감이나 곤충도감을 뒤져도 이름 하나 찾기 어려운 나로서는 벌레를 한번 척 보고 애벌꼬리박각시니 알락수염노린재니 하는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그들이 부럽다. 학자들은 자신의 연구 대상에 대한 애정인지, 아니면 생물에 대한 경외심인지, 그도 아니면 품성이 원래 그런지 몰라도 꿈틀거리는 애벌레나 참을 수 없이 징그러운 벌레를 손바닥에 올려놓고 들여다본다. 하물며 기생충까지도!

벌레들에 대한 적대감이나 혐오감을 버리지 못한 채로 나에게 벌레의 존재는 다른 방식으로 각인되었다. 내가 하는 일은 목수다. 작업을 하면서 벌어지는 일들, 의자나 책상 따위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깎거나 다듬고 연장을 벼리거나 기계를 쓸 때마다 나의 일들이 벌레가 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끊임없이 나무를 쏠아대는 벌레와 끊임없이 나무를 깎아대는 목수. 그리고 끊임없이 꼼지락거리면서 자기 식대로 세상을 파먹는 벌레들과 부산하게 자기 일을 찾아 일하는 사람들. 벌레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반추하면서 벌레를 다시 본다. 매일처럼 하게 되는 반복적인 일에 쉽게 짜증을 내는 나와 달리 벌레는 비슷한 행위를 지치지 않고 해댄다. 그런 벌레들이 때론 존경스럽다.

나무를 갉는 벌레가 제 먹을 나무를 정확히 찾아내듯이 나무 작업을 하면서 쓸 만한 나무를 찾아내고 그러다 보면 나무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나무에 대한 나의 지식은 한 권의 식물도감에 미치지 못한다. 어림도 없다. 작업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꽤 많은 작업을 했다고 생각하지만 일에 관해 정리해 보면 노트 한 권을 채우지 못한다. 어찌 된 일인가? 벌레가 하는 일처럼 일 자체가 단순해서? 아니면 글로 옮기는 데 게으르거나 무능력해서? 아마 둘 다일 것이다.
경험으로 채워야 할 일들. 처음엔 나무 작업이 몸으로 때워야 하는 단순한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몸으로 하게 되는 나무 일의 경험은 체계적으로 구조화할 수 없는 지식이다. 좀처럼 누구에게 전달될 수도 없다. 그러나 ‘몸을 쓰는 일이 다 그렇지 뭐!’라고 말하기에는 뭔가 억울하다. 그럴지도 모르지만 정말 벌레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나무 작업을 하면서 채워지지 않는 지적 욕구는 책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지만 다른 내용이면 몰라도 책을 통해서는 나무 작업에 필요한 지식을 얻을 수 없었다. 책이 채울 수 없는 빈 구멍이 늘 존재한다. 이상하다. 지식의 보고인 책이 채울 수 없는 영역이 있다고? 그 순간 경험은 열등한 지식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몸으로 겪으며 채워 넣을 수밖에 없다면, 경험이란 책에서 보이는 이론화된 지식이 아닌 다른 형태의 지식이어야 한다. 나무에 사는 벌레들이나 들꽃을 보면서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벌레는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사람은 인지와 학습ㆍ경험에 의한 판단으로 움직인다. 본능은 경험보다 열등한 형태의, 말 그대로 본능일 뿐이다. 하지만 벌레를 들여다보거나 숲에 들어가 나무와 풀을 보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된다. 동물의 본능이나 식물의 생태 역시 인지와 학습과 경험이 누적된 진화의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벌레의 본능이나 풀의 생태는 다른 형태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사람과 다를 뿐.

이상한 이야기지만 벌레가 벌레를 말할 수 없다면 목수 역시 목수를 말할 수 없다. 학자들의 관찰과 기록은 벌레의 생태이지 벌레들의 경험과 지식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듯이 작업에 대한 나의 기록도 목수의 작업과 행동이지 목수의 경험과 지식이 아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육체적인 노동에서 얻어진 경험들은 책을 통해 얻어지는 정보와 지식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벌레들의 세계도 그럴 것이다. 다시 나의 처지는 벌레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나무 작업을 하는 목수에게 벌레는 그 이상이다. 나는 벌레의 경험을 통해 목수의 지식 절반을 얻었다. 적어도 벌레 수준에서 보자면 그렇다. 벌레를 보고 나무를 알게 되었으며 나무를 보면서 꽃들을 만나게 되었다. 숲은 나무 벌레들의 세상이자 그들만의 지식 고고학이 펼쳐지는 곳이다. 숲을 보면서 처음으로 목수의 경험이 자연의 현상을 흉내 내는 일일지도 모르며, 인간의 문명 역시 다른 많은 종처럼 자연의 모사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갖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 글은 모두 세 마디로 이루어질 것이다. 첫째 마디, 벌레에 대한 인간의 편견이 혹시 터무니없는 문화적 오만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시작해 보자. 인간과 벌레 사이에 존재하는 우열의 서열화는 너무나 뿌리 깊다. 그 오해는 벌레의 본능을 단지 꿈틀거리는 욕망 덩어리로 보려는 오래된 인간의 지적 오만에서 비롯된다. 인간의 문화 속에서는 본능과 경험이 지식보다 열등한 무엇이다. 그러나 벌레뿐 아니라 주변적이고 사소한 자연 현상들은 우리의 시각을 바꾸면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벌레에 대한 오해를 씻어낼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것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조금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마디, 벌레와 다를 바 없는 목수가 사는 법이다. 벌레가 끊임없이 나무를 갉아내며 자연을 헐어내듯이 목수 일 역시 자연의 일부를 헐어내는 일이다. 그리고 사람들 모두 어느 정도는 그렇다. 하나의 평범한 직업이 갖는 경험의 폭은 개인적이자 동시에 사회적으로 걸쳐 있다. 사람의 일이 갖는 모순과 한계를 목수가 하는 일을 빌려 말하려 한다. 더불어 목수의 경험이 지닌 우매함과 답답함도 함께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셋째 마디, 결핍을 채우는 상상력. 자연에 대한 인간 우위의 시각이 벌레에 대한 편견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육체적인 노동의 경험을 열등한 무엇으로 말하는 것 역시 그런 시각에서 비롯된 인간의 문화적 현상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이해는 인간의 지식이 지니고 있는 서열화의 과정이 아니라 상상력을 통해 이루어진다. 상상력은 또 다른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결핍을 채우는 상상력이 이 글 전체의 결론쯤이 될 것이다.

이 글은 나무를 파먹는 벌레에 관한 것이거나 나무를 깎아 물건을 만드는 목수에 대한 것이거나 자연을 바라보고 또 이용하는 인간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걸 매끄럽게 이어갈 수 있을지는 아무래도 자신이 없다. 그저 나무를 파먹는 벌레와 목수가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혹은 꽃과 나무가 그득한 숲과 인간의 문명이 어떻게 다르고 같은지 살펴보는 생각의 편린들로 이어질 것이다. 나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세 영역을 때로 구분하고 때로 뒤섞어 이야기할 것이다. 이 글의 절반은 나무를 깎는 목수의 생각이지만 나머지 절반은 벌레들의 이야기다. 그 출발은 세상의 벌레들이 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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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송씨는 '목수 김씨'로 알려졌으나 『현대성의 형성-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를 쓴 근대 연구자, 『기억을 잃어버린 도시』의 소설가,『이쾌대』의 미술평론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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