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권감독원장「정치」에 민감한 자본시장 사령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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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요즘 증권감독원이 갑자기 바빠졌다. 현대그룹이 비 상장계열사 주식을 종업원에게 넘겨주는 과정에서 증권거래법이 정한 절차를 어겼다는 은행감독원의 통보에 따라 특별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 조사결과가 어떻게 나오며 또 그에 따른 현대측 관계자들에 대한 처리내용에 이목이 집중돼 있다.
공개 된지 석 달만에 상장사인 신정제지가 부도를 내자증권감독원은 또 주목을 받았다. 증권감독원은 곧바로 회사에 나가 특별 감리를 벌이고 있으나, 신정제지측 노조원들이 저지하는 바람에 회사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올 들어서만 벌써 12개, 90년9월 대도상사이후 25개 나되는 상장사의 부도사태에 따라 증감원은 기업공개제도를 강화키로 했다. 정부와 현대그룹 및 국민당의 갈등이 심각했을 때 현대계열사 들이 신청한 유상증자와 회사채발행이 제한되자 화살이 증권감독원에 쏠리기도 했다.
증권감독원은 경제가 정치상황에 밀려 흔들리면서 일약 유명해진 셈이다.
그러나 증권감독원의 본래자리는 이같이 정치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한나라의 직접금융 조달시장으로서 중요한 증권시장을 건전하게 육성시킬 책임을 갖고 관리감독 하는 곳이다. 따라서 걸핏하면 증권투자자들의 화풀이 대상이 됐다.90년10월 이른바 깡통계좌를 정리했을 때 성난 투자자들이 몰려와 한바탕 소란을 피웠던 기관이다.
증감원은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주식투자자들이 증시부양책 마련을 요구하며 시위할 때 꼭 들르던 곳 중의 하나였다. 물론 요즘은 우리 투자자들도 성숙해져 감독원에까지 와서 시위를 하는 경우는 없어졌지만 1백43만 주식투자자들의 눈은 항상 이 곳에 쏠려있다.
이름에「감독」이란 단어가 들어가 있는 기관이 실제론 별 힘이 없듯이 증권감독원 직원들은 권한에 비해 무거운 책임을 묻는 소리가 되돌아 온다고 푸념한다. 증시가 연말장도 피워보지 못하고 질금거리던 91년12윌24일에 있었던「선용융자 기한 연장 세」해프닝은 증권감독원의 이 같은 위상을 잘 설명해 준다.
이날 시장에는 갑자기 다섯 달로 돼있는 주식 외상거래 허용기한을 석 달 더 늘려준다는 소문이 퍼졌다. 장이 반짝 했던 지난해7월 외상으로 주식을 사들인 신용거래가 다섯 달째인 12월부터 매물로 쏟아져 장에 압박을 가하던 시기였다.
이 소문은 12월23일 저녁증권정책을 거머쥐고 있는 재무부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며, 증권감독원은 이날 쏟아지는 비난을 감수하면서 「없었던 일」로 했다.
사실 이 문제는 증권감독원이 독자적으로 검토해 결정해야 할 성격인데, 재무부의 지시에 따라 검토했다가 문제의 해결이 아닌 이월」이라는 이유를 들어 후퇴했다. 증권전문가들은 설령 재무부에서 검토하라고 했어도 증감원에서 문제가 많다는 점을 확실하게 미리 설명했더라면 이날 풍문에 따라 주가가 춤을 추는 일은 막을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이에 따라 증권업계는 증권감독원이 고작 증권사 증권협회·증권금융 등 증권관계기관의 업무검사 때나·「호랑이 짓」 을 하지 어지간한 것은 상부기관의 눈치보기에 급급하다고 비아냥거린다. 증권감독원 직원들은 대부분의 업무가 증권거래법 상정해져 있는 사항들을 집행하는 정도며, 그것도 사사건건재무부와의 협의를 전제로 하는 게 상례여서 제 밥그릇도 못 찾아 먹는 격이라고 푸념한다..
이 같은 증권감독원의 업무성격 때문에 증권감독원장이란 자리도 상당히 고단한 위치다. 흔히 카본시장 관리의 총사령관」으로 불려는 증권감독원장으로서 일을 제대로 힘있게 하는데 필요 충분한 조건은 무엇보다 정부 측 재무부와의 관계가 원만해야 하며 그곳에 미치는 영향력도 상당해야 한다.
여기에 정치적인 배경과 역량을 갖추고 있으면 더욱 환영받는 원장이 된다는 점을 역대 원장의 면모를 보면 알 수 있다.
지금까지의 원장 5명중재무부장관까지 지낸 경우가1명, 재무부차관 출신이 2명, 나머지 2명도 재무부의 국장·과장 출신으로 한결같이 재무부와 연을 맺은 사람들이다.
증권가는 대표적으로 말이 많은 동네다. 온갖 루머가 난무해 소문을 먹고산다고 할 정도다. 따라서 어떤 원장은 증권사 사장과 따로 점심 먹는 것도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누구와 개별적으로 만났다 하면 금세 소문이 퍼지며 전혀 엉뚱하게 시장에 영향을 줄 수도 있어 공식적인 모임에선 접촉해도, 개별적으로 만나는 것은 가급적 삼갔다고 한다. 2대 박봉환 원장과 현 박종석 원장이 그런 편이란 이야기를 듣고 있다.
제1대 홍승희 원장은 산업은행 총재·재무부장관을 지냈다. 정책결정을 할 때는 소신을 굽히지 않아 65년11월 재무부장관 재직당시 장기영 부총리의 성장논에 안정 논으로 맞서다 사표를 낸 인물이다.
홍 원장은 증감원 초기에 연임, 5년 동안 있으면서 증감원의 골격을 세웠다. 그러나 대 재무부 관계에 있어서는 너무 유연했다는 평을 들었다.
2대 박봉환원장은 증권감독원장은 물론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제선생님」으로 잘 알려진 인물. 재무부차관과 동자부장관을 지낸 뒤 증감원장으로 옮겨 앉았다. 대쪽같은 성품에 이론적·논리적인 사고를 직원들에게도 요구했다·원장 재임시절『현대 자븐주의-그 고뇌와 활로(상·하2권)를 펴내는 등 대단한 학구열을 보였다. 이 책으로 그는 90년 전경련이 제정한 자유경제 출판문화상의 첫 대상을 받았다.
그는 7년 동안 증감원장으로 있으면서 자신의 자로 재 쓸만한 사람이면 과감하게 발탁했으며 84년 계열기업끼리의 상호줄자를 제한하는 상법개정에 깊숙이 관여했다. 박 원장은 전경련 빌딩에 세 들어 있는 증권감독원의 오랜 숙제인 독립청사 마련을 위한 부지를 전 경련빌딩 바로 북쪽에 마련했다. 새 청사는 지하4층·지상20층 규모로 지난 90년9월 착공돼 93년 말 완공을 목표로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3대 정춘택 원장은 11개월이란 짧은 재임기간에도 불구, 대통령과 고등학교 동기이자 이른바「TK세력」이란 점 때문에 상당한 정치적 실력을 발휘했던 원장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어려웠던 청사신축 건축허가를 받아냈으며 직원수도 늘렸다. 직원들은 당시 일상 업무를 추진하는데 재무부의 입김이 약한 편이었다고 회고한다.
박봉환 원장과 정춘택 원장재임시절 자본시장 개방을 앞두고 상장기업을 적어도 1천개, 주식인구를 5백만 명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식의 무리한 기업공개드라이브정책이 추진됐다.
이에 따라 자본금 규모와 자기자본등 기본적인 요건만 갖추면 대부분 공개됐다.
당시 이 정책은 재무부가 밀어 붙였는데, 두 증감원장이 너무 무리라는 증권 쪽의 의견을 「무게 있게」전했더라면 90년9월 이후 잇따른 상장사의 부도 및 법정관리 신청으로 나타나는 후유증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4대 정영의 원장은 잠깐 앉았다 간 셈이었다. 한달 보름만에 재무부장관으로 옮겨갔다. 두 정원 장은 통상 임기인 3년을 채우지 못했다.
현 박종석 원장(5대)은 90년3월 증시가 침체국면이 뚜렷해졌을 때 은행감독원장에서 옮겨 앉았다. 그 이후 줄곧 내림세인 어려운 시장상황에서 뒤치다꺼리를 하고있는 셈이다.
박 원장은 90년10월 깡통계좌를 정리할 때 투자자들의 시위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투자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하는 진지함을 보였다.
88∼89년 무리한 기업공개드라이브 정책의 여파로 상장사의 부도가 잇따르자 91년9월 자본금규모 등을 높이는 식으로 기업공개 제도를 강화했다.
재무부 과장시절인 지난74년 한국은행으로 옮겼으며, 줄곧 은행 쪽에서 자리를 다진 그는 올 초 한은 총재 하마 평에도 올랐었다.
역대 원장 중 재무부 재직 때의 직급은 가장 낮지만 가장 어려운 시기에 합리적으로 진지하게 시장을 들여다보며「인기 없는 시장안정시책」을 계속 내놓으면서 증시안정을 꾀하고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우리 주식시장이 그 중요성에 비해 인식도가 낮다고 보는 박원장이 당장 넘어야 할 가장 험한 고개는 현대그룹의 증권거래법 위반사건에 대한 처리문제다. <양재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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