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출신이 뿌리… 극한 투쟁 한계/시위주도 태국 야권의 실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야­학생연대 「민주주의연」이 핵심/국민들 개혁요구 소화될지 의문
태국 시위를 주도하고 있는 세력은 「민주주의를 위한 연맹」이라는 연합체다.
이는 잠롱 스리무앙이 이끄는 팔랑탐당 차왈리트 전국군 총사령관이 당수인 신희망당,변호사 추안이 이끄는 민주당 등 4개 야당 대표와 전국 대학생연맹 등 대학생과 교수 대표 및 빈민운동가 7인이 뭉친 연대조직이다.
이들은 지난 10일 집권 5개당 연합체 대표와 개헌에 합의한 뒤 시위를 잠시 중단시켰고 17일 시위를 재개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현 야권의 핵심세력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번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은 학생·교수 등을 비롯,태국사회의 전통적인 진보계층과 저소득층의 사회불만 세력이 기둥을 이루고 있지만 회사원과 고급승용차에 휴대폰까지 소유한 중년의 기업인들도 적지않게 눈에 띄었다.
이번 시위가 학생들로만 이루어졌던 지난 73년의 시위와 다른점은 바로 시위세력의 폭이 이처럼 중산층으로까지 확대된 점이다. 태국정부도 이점을 중시,버스의 운행 중단을 포함한 3일간의 휴무일(20일까지)을 선포해 학생 등 극렬시위대와 중산층의 분리를 시도하고 나섰다.
그러나 이런 외양적인 성공에도 현지 전문가들은 이번 시위가 군부통치를 종식시키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오리라 기대하지 않는 것 같다. 이같은 전망을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위 주도세력의 한계 때문이다.
우선 사실상 시위를 주도하는 잠롱 당수 자신이 이번 시위목표를 군의 정치참여 완전차단으로 삼고있지 않다.
그는 군 지도부의 정치적 역할을 일정부분 인정하는 쪽이다. 그 자신 군출신이고 군 내부 육사 7기 동기생들의 후원을 배후세력으로 하고있기 때문이다.
육사 7기는 80년초 크리앙사크총리를 몰아내고 프렘총리를 옹립·지원한 젊은 장교그룹으로 수친다 현총리가 이끄는 육사 5기 중심세력과 대립하고 있는 군의 잠재적 대안이다.
신희망당 당수 차왈리트 역시 수친다의 바로 전임국군 총사령관으로 군의 정치참여 자체를 원천봉쇄 하겠다는 노선은 아니다. 그도 군내부 일부의 신망을 등에 업고 정치에 입문했으며 이미 그를 지지하는 부대들이 시위가 장기화 하면서 동요를 보이고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들도 군의 정치참여와 부패구조에 깊숙히 연루돼 있어 개혁정치를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에 전적으로 동조하기도 어렵고 수친다총리 세력에 극한으로 맞서기도 쉽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야권의 핵심인 이들의 주장은 수친다총리의 사임과 조기총선 및 개헌에 국한되고 있다. 학생·교수대표·빈민운동단체 등 「민주주의를 위한 연맹」에 참여하고 있는 나머지 세력들도 대중에 뿌리박은 거대한 힘이나 조직을 갖고 있지 못하다.
태국의 소승불교,복종적인 사회문화 및 왕가에 대한 애정은 군부독재와 빈부격차의 심화에도 불구,재야세력의 토양으로는 척박했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시위가 있기전 이들 재야세력이 주도한 시위에는 고작 1백여명 안팎의 지지자들만이 모였을 뿐이었다. 더구나 차왈리트와 잠롱은 서로 경쟁관계다. 차왈리트는 지난 총선에서 72석을 얻은 제3당이고 잠롱은 방콕의 35석 가운데 32석을 휩쓸고 모두 41석을 얻은 제5당이다. 평소 차왈리트는 잠롱을 독재적이라고 비난해 왔고 잠롱은 그가 원칙없이 지나치게 타협적이라고 맞서왔다.
수친다총리가 핵심시위대와 중산층을 분리하면 승산이 있다고 강경책을 구사하는 것은 이런 야권의 약점 때문이다.
푸미폰국왕도 빈번한 쿠데타와 이번 시위 사태에서 보여주듯 위기상황에서 발휘할 수 있는 실질적 힘을 전혀 갖고있지 못하다.
태국의 국왕은 군부와 집권세력에 이용당하면서 일반 대중의 동정을 받는 처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국왕이 이번 시위를 계기로 군부통치를 종식시킬 수 있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많은 인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이번 시위가 태국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분만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는 까닭이 여기에 있고,그래서 태국의 현 상황을 중국의 천안문 사태로 비유하는 외신도 적지않다.<이재학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