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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 여사, 전처소생 장녀 적극 중매|결국 한집 살던 한병기씨와 결혼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이 시절 쌀이 떨어질 정도로 생활이 곤란했던 육 여사는 2사단 포병단에 근무하던 원 중위에게 다시 도움을 청했다.『땔감도 없고 쌀이 떨어져 굶을 지경이라는 거예요. 당시 나는 총각이었고 생활의 곤궁함을 겪어 본 적도 없어서 사실 언짢은 기분이었지요. 그러나 모시던 상관부인의 부탁이라 외면할 수는 없었어요. 20사단 부사단장이던 이주일 준장을 찾아가 사정을 말하니 돈 2만환과 쌀 두어 가마를 주더군요. 또 26사단 참모장이던 김재춘 대령을 찾아가니까 돈 몇만환과 쌀 한가마, 별도로 내 차비를 하라고 5천환까지 얹어 주길래 서울로 가서 육 여사께 전해 드렸습니다.』

<땔감용 전봇대 수송>
원 중위는 또 못쓰게 된 전봇대 두 개를 군용트럭 양옆에 매달아 서울로 밀반출했다. 육 여사집 땔감용이었다.
후일 경희대 교수가 된 원병오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도움으로 2억원의 자연보존 기금을 타내 한국 자연보존 협회 설립에 기여하게 된다. 박대통령으로서는 과거에 진 빚을 톡톡히 갚은 셈이다.
박정희 준장이 유학 중이던 미국의 포병학교에서는 통역장교이던 김종운씨(현 서울대총 장)도 함께 교육을 받고 있었다. 어느날 점심시간에 구내 식당에서 군용식판을 들고 줄을 서서 배식 차례를 기다리던 박 준장의 양쪽 귀를 누군가가 뒤에서 꼭 잡아당겼다. 김종운씨와 친한 한 위관급 미군이 키가 작은 박 준장을 김씨로 착각하고 장난을 건 것이었다. 두 귀를 잡은 채 양쪽으로 번갈아 흔들어 댔으니 영문 모르고 당한 박 준장은 화가 치솟았을 것이었다.
『누구냐.』몇 번이고 물어도 뒤에서는 귀를 잡아 머리를 돌리지 못하게 해놓고 쿡쿡 웃기만 했다. 그때 주위의 미군 동료들이『제너럴(장군)』이라고 그 미군에게 알려주었고, 그는 혼비백산해 두 손을 놓았다. 이 소문이 퍼지자 장군을 모욕한 그 미군은 곧 다른 곳으로 전보되었다. 1954년 6월27일 박 준장은 유학을 마치고 귀국, 강원도 화천의 2군단 포병사령관으로 발령 받았고 6월30일에는 근영 양이 태어났다.
육영수 여사는 53년께부터 남편의 전처(김호남 여사) 소생인 박재옥씨의 혼사문제에 꽤 신경을 기울였던 것 같다. 육 여사와 재옥씨는 모르는 이들이 자매로 착각할 정도로 사이가 원만했다. 그만큼 서로가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기질이나 풍기는 분위기도 비슷한 편이었다. 육 여사는 부관시절의 원병오 중위를 넌지시 떠보았다. 원교수의 회고.

<사이좋아 자매착각>
『하루는 육 여사가「우리 친척 중에 고등학교를 나온 참한 색시감이 있는데 원한다면 선을 보게 해주겠다」고 해요. 나는 그때 스물네살이었지만 이북에서 월남한 처지이고 제대하면 공부를 더 하려고 마음을 다지고 있었어요. 결혼자체에 별 뜻이 없었지요. 곰곰 생각하니 그때 김종필씨 집에 머무르고 있던 박 대령의 따님이 혼담 대상이라는 추측이 들었지만 여하간 나는 결혼할 계획이 전혀 없을 때였어요. 얼마 후 이번엔 박 대령도 있는 자리에서 또 권해요. 특별히 돼지족발에 정종까지 곁들인 저녁상이 놓인 자리에서였지요. 내가 난색을 하니까 육 여사는 다른 오해를 했는지「우리라고 항상 가난하게 살겠느냐.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서로 돕고 살수 있는 것 아니냐」고까지 말하더라고요.』
남녀간의 인연은 역시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박정희 준장이 뒤에 5사단장으로 근무할 당시 부관이던 한병기씨(61·전 국회의원·캐나다대사, 현 설악관광 회장)는 생활이 여전히 곤궁하던 육 여사 집에 사단장 모르게 쌀가마를 갖다 주러 갔다가 재옥씨와 처음 마주쳤다. 1955년 하반기, 육 여사가 노량진의 셋방에 살 때였다. 『박 장군 댁에 처녀 두명이 놀러와 있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집사람(박재옥 여사) 과 김종필씨 부인 박영옥 여사의 여동생이었지요. 그날 사단장 지프에 두 사람을 태우고 김종필씨 집에까지 데려다 준 기억이 납니다. 그후 그 댁을 드나들면서 사단장님의 딸이구나 하는 감을 잡았지요.』
56년 7월 진해의 육군대학에 입교한 박 장군을 따라갔던 한 중위는 곧 육군본부로 발령을 받고 서울로 가게됐다. 박 장군은『서울가면 있을 곳이 없을 테니 우리집(충현동·지금은 신당동)에서 다녀라』고 권했다. 당시 충현동 집에는 박 장군의 장모 이경령 여사와 재옥씨, 근영양, 연락병(박환영씨)등 4명이 기거하고 있었다. 한 중위는 연락병과 함께 2층의 다타미방을 썼다.
『한집에 처녀 총각이 사니 자연 정이 들게 됐지요. 58년 1월 내가 미국 육군 통신 학교로 유학갈 무렵에는 서로 연정을 느낄 정도가 됐어요.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지요. 뒤에 들으니 집사람이 한번은「한 대위한테서 편지가 왔다」며 육 여사에게 편지를 보여주니까 이미 우리 사이를 짐작하고 있던 눈치였다고 해요. 그해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뒤 박 소장(당시1군 참모장)에게「재옥양과 결혼하겠습니다」고 말했지요.「너 임마, 결혼하면 내가 더 기합 넣을 거야」라고 농담을 하시더군요.』

<우리 집서 다녀라>
58년 10월3일 서울 종로4가의 동원예식장에서 한병기-박재옥 부부는 맺어졌다.
이듬해인 59년 7월 박정희 소장은 6관구 사령관으로 임명됐다가 60년 1월21일 부산의 군수 기지 사령관으로 옮겼다. 박 소장은 다시 1관구 사령관(광주) 육본 작전 참모부장을 거처60년 12월15일 2군부 사령관(대구)으로 발령 받았다.
이 당시 옛 상관인 박 소장 집을 방문했던 원병오씨는 육 여사가 술에 취해 귀가한 남편과 나눈 대화를 기억하고 있었다.『당신, 혁명하려다 탄로나(대구로) 쫓겨났다면서요?』 육 여사가 묻자 박 소장은『내가 진짜 그 정도나 되면 괜찮게』라고 대답했다. 취중에도 속마음을 철저히 감추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러나 61년 5월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은 총칼로 권력을 장악했다. 꼭 31년 전이었다.<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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