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이 본 우리 농촌 현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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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칼라 힐스는 정부더러 발가벗고 달라 하고/정부는 주기는 주되 천천히/천천히 무드 잡으며 벗으려 하는…』(시 「엽색행각」 중에서)
35세의 농민시인 이중기 씨가 시집『식민지 농민』(해성 간)을 펴냈다. 이씨는 경북영천에서 과수와 논 농사를 하며 현장에서 우러나는 시를 쓰고 있다.
그는 구차한 등단절차를 밞아 문단에 나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시집에 실린 87편의 시중에는 현실의식과 예술성이 녹아든 작품들도 많다.
4행의 짧은 이 시「엽색행각」도 그중 한 편이다.
「엽색행각」은 우리에게 우루과이라운드의 상징처럼 떠오르는 여자 미 무역대표 부대표 칼라 힐스와 정부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포착, 언어로 절묘하게 그려낸 시사만평 한 것 같은 시다.
이씨의 시들에는 정확한 오늘의 농촌현실이 들어있다. 교육받은, 의식화된 현실의식이 아닌 부대끼며 겪고 있는 농촌현실을 그곳 정서로 비범하게 어우른 시적 진실로 하여 거부감 없이 메시지가 감동으로 다가온다.
『꽃피는 사월이면 한 번 연락 주십시오/노귀재 넘어시티재 갑티재 넘어/능금꽃지는 풍경 구경하러 오십시오/내리 삼년째 무서리떼가 덮친 과원에서/결빙의 꽃들이 떼죽음하는 풍경 보러 오십시오/과수원 서리피해 보상금 잘 받았습니다/올해같은 사과농사 흉년에/그돈 가게에 유용하게 보태어 쓰겠습니다/평당 89원씩 계산해서 나온 서리피해 보상금/물경 일천오백원 황공하게 받았습니다.』
서리 피해 보상금 책정 자에게 보내는 형식을 취한 시「편지」의 일부분이다. 정부의 주먹구구식 농정이 즐거운 시행들을 따라 서럽도록 확연하게 드러난다.
대부분의 젊은 농부들이 그렇듯이 이씨도 도시 산업지대를 떠돌다 그래도 내가 할 일은 농사밖에 없다며 농촌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잘못된 농정을 탓하면서도 흙을 일구다 묻힐 것이다.
『그 세월 잔등을 밟아가면 언제쯤/밥상위의 푸성귀처럼/싱싱한 대화 만개할/그리운 나라 갈 수 있을까/한낱 필부로 살아서도 후회없을 세월/만날 수 있을까, 그 세월 만날 수 있을까.』(「그리운 나라」중)
갈 수「있을까」를 거듭하며 회의를 나타내고 있는「그리운 나라」는 이씨의 나라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그리운 나라다. 그 나라가 왔으면 한다. 그 나라가 빨리 되도록 해야겠다는 메시지를 이씨의 시집『식민지 농민』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전하고 있다. < 이경철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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