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순차적으로 풀어야(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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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3월이후 달포 남짓만큼 남북한사이의 접촉과 대화가 여러 통로를 통해 집중적으로 진행된 때는 없었다. 합의서와 비핵화선언이 발효되면서 정치·군사·교류협력 부문의 8개 분과위원회와 핵통제공동위원회가 구성되어 각기 이미 몇차례씩의 회합을 끝냈다.
이처럼 짧은 기간동안 어느때 보다도 많은 접촉이 있었지만 여론과 일반국민의 관심은 어느때 보다도 비교적 적었던 것 같다. 선거철이 겹치기도 했지만 대화에서 기대를 걸만한 진전이 없었던 탓이다.
그런 가운데서나마 10일의 두가지 진전은 남북한관계의 장래에 어둡지 않은 신호를 보내고 있다. 하나는 교류협력분과위원회 실무접촉에서 육·해·공로 개설문제 및 경제교류문제와 관련해 상당한 의견 접근을 이루어냈다는 점이고,또 하나는 북한이 핵안전협정의 비준과 함께 우려하던 것처럼 시간을 끌지않고 그날로 국제원자력기구에 통보해 발효시켰다는 점이다.
경의선철도를 연결하고 김포∼순안사이에 항공로를 개설하는 한편,인천∼남포 등의 해로를 열기로 합의했다는 사실은 감상적으로나마 통일이란 말을 연상시켜 준다. 또 경제교류에 대비한 갖가지 법률·기술문제에서부터 사회문화 분야 교류에 이르기까지 많은 합의를 이끌어 냈다는 것은 최근 얼마동안 의견대립의 인상만 주어온 남북대화 분위기와 관련해서도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이처럼 교류의 필요성과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공동인식을 갖고 있으면서도 북한의 정치·군사 우선원칙에 밀려 이러한 합의가 실현되려면 아직 상당히 많은 고비가 예상된다. 이번 합의를 이끌어 내면서도 북한측이 「군사적 대결상태의 해소」를 전제조건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한의 전제는 비단 교류협력분야 뿐 아니라 남북대화 전반의 원칙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 각 위원회에서의 양측의 제안과 주장,토의내용은 원칙문제의 이견으로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이른바 남한의 「건별합의,단계적 실행」과 북한의 「일괄합의,동시실천」 원칙의 대립이다.
남한측은 합의서내용을 실천하기 위해 각 항목별로 쉬운 문제부터 풀어나가며 의견이 합치되는대로 그때그때 이행해 나가자는 것이고,북한은 문제가 모두 타결된 다음 한꺼번에 이행하자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가운데 북한이 주안점을 두고 있는 것은 물론 정치·군사분야다. 이 부문에서 정치분과위원회에 내놓고 있는 북한측 주장은 대부분 고려연방제라든가 통일전선전략 등을 많이 담고 있다.
그런 사실로 미루어 북한은 아직 본격적으로 남북교류를 실현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그래도 아쉬운대로 쉬운 문제에서부터 적으나마 하나하나 합의실적을 쌓아가는 일이 다른 부문에서도 계속된다면 남북한관계에 대해 실망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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