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한 관계개선의 전제조건(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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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미국과 접촉기회를 늘리려는 북한의 노력은 필사적이라고 할만큼 끈질기다. 남북한 문제와 관련해 남한을 제치고 미국과 직접 협상을 벌이겠다는 미련 때문이다.
최근 북한 노동당 국제부장이 미 정부에 관계개선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는 보도는 그러한 집요함을 드러내고 있다. 지난 1월 김용순 노동당국제부장이 미국에 가서 아널드 캔터 국무차관을 만났을때 약속했던 핵문제에 관한 조치들을 취하고 있으니 미국도 관계개선을 위해 「성의있는」 행동을 하도록 요구했다는 보도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전협정도 체결하고 북한 최고인민회의에서 비준단계에 들어가는 참에 내놓은 이 요구의 속셈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IAEA의 사찰이 실시되기 전에 미국과 고위급 접촉을 시도하는등 핵문제를 흥정거리로 계속 우려먹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이러한 요구는 앞뒤가 바뀐 것이다. 우리가 알기로 미국의 북한과의 관계개선 조건은 북한의 핵무기 제조능력여부와 연계되어 있다. 그러한 능력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다음에야 개선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북한에서 핵안전협정이 비준된다해도 아직 핵사찰의 시기는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않아 불투명한 상황이다. 또 IAEA의 사찰이 이루어진다 해도 북한이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시설과 물질을 은폐할 가능성이 많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요구하기 전에 이러한 불확실한 점 등을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한은 이미 『남한에서 핵무기가 철수되는 것이 확인되기만 하면 핵사찰을 받겠다』고 한 약속을 이 핑계 저 핑계로 깨뜨렸을 때 이미 치명적인 불신을 자초했다. 한반도에서 핵무기의 완전한 철수가 확인된 뒤에도 갖가지 조건을 붙이며 사찰을 거부함으로써 실제로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의사를 갖고 있다는 의혹을 깊게 한 것이다.
그러한 불신때문에 미국조야의 일각에서는 최악의 경우 무력공격을 해서라도 북한의 핵능력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올 정도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핵카드를 계속 이용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큰 오산이다.
시간을 끌수록 불신은 커져만 가고 북한에 대한 강경론은 더욱 설득력을 더할 가능성이 많다. 그러한 일이 오기전에 핵문제에 대한 의혹을 깨끗하게 거두고 미국과의 관계개선 노력을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을 북한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또한 남북한 관계증진의 길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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