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작가(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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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문학하는 일이 생계의 방편일 수 없다는 점에서는,60년대까지만 해도 문학은 직업이 못되었다.
며칠밤을 새워가며 작품한편을 완성해 원고료를 손에 쥐어봤댔자 하루저녁 술값으로 날려버리기 예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문인들은 작품활동을 하면서도 문학과는 관계없는 또다른 직업을 갖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문학이 직업화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문학의 직업화를 선언하고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 3일 별세한 소설가 이병주씨다.
언론인·교수등 다채로운 직업을 집어 치우고 그가 문단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65년,그의 나이 44세때였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30세 전후의 젊은 나이에 데뷔했음을 감안하면 10년 이상이나 늦은 셈이다.
그러나 늦은 등단을 보상이나 받으려는듯 그는 누구보다 많은 작품들을 쏟아냈다. 소설가로서 가장 왕성했던 시기가 남들이면 펜이 무뎌졌을 환갑 전후의 시기였으니 그런 점에서도 좀 별난 소설가라 할 수 있다.
그무렵 그의 집필량은 2백자 원고지로 따져 월평균 1천장에서 1천5백장에 달했다. 신문연재소설 네개,잡지연재소설 두개를 한꺼번에 집필한 것이다.
등장인물이 뒤바뀌는 해프닝도 있었고 심한 경우 내용조차 서로 엇갈리는 일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떤 종류의 원고청탁도 거절하지 않았다. 에세이·기행문·칼럼등 글의 종류가 다양하기로도 우리 문단에서 단연 으뜸일 것이다.
두권으로 발간된 『여성론』은 그의 페미니스트적 기질과 관련해 화제를 모았고,전두환 전대통령의 사과성명 집필에 참여한 것도 글쓰는 일을 철저하게 직업으로 삼았음을 감안하면 이상할 것이 없다.
술을 즐겨 거의 매일 술자리를 가졌던 그는 주로 새벽녘에 작품을 썼고,작품을 쓰는 동안에는 어떤 사람의 방해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직업작가」의 한 전형이었다.<정규응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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