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학' 임권택 감독, "김명곤 장관 출연 무산 차라리 잘됐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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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장관께서 출연하기로 했었는데 장관 되시는 바람에 무산됐지. 작품 나오고 보니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김명곤 문화부장관(오른쪽)은 13일 저녁 용산 CGV에서 임권택 감독(왼쪽)과 함께 영화 <천년학>을 관람하기 위해 만나 담소를 나누고 있다. 영화 <천년학>은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이다. (서울=연합뉴스)

13일 오후 9시 서울 용산CGV 부근 호프집. 임권택(71) 감독의 우스갯소리에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저 대신 출연하신 임진택(유봉 역)씨가 참 부럽고 신나보였지요."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이 홍조를 띠며 말을 받았다. 금요일 밤, 배우 출신 장관과 거장 감독이 영화관 나들이에 나섰다. 임 감독의 100번째 작품 '천년학'을 함께 관람한 자리. 정일성(78) 촬영감독과 주연배우 조재현.오승은이 함께했다. 영화진흥위원회 안정숙 위원장과 제작사 KINO2의 김종원 대표 등 내로라하는 영화계 인사들도 눈에 띄었다. 그 밤 예인들의 수다는 늦도록 이어졌다.

#"출연 무산 잘됐다 했지"

"훌륭한 영상 배경에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이야기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영화 관람 후 김 장관이 상기된 표정으로 운을 뗐다. 당초 극 중 유봉 역은 김 장관 몫이었다. 김 장관은 14년 전 '천년학'의 전편 격인 '서편제'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촬영을 앞두고 문화부 장관이 되면서 임진택(57)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부회장에게 유봉 역이 돌아갔다. "판소리를 어떻게 영상으로 저렇게 처리할 수 있는가 감탄했습니다. 장면마다 흐르는 소리란…." 취임사에서 자신을 '광대'라 칭한 김 장관이다. 출연 무산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아쉽지만 나라 위해 큰 일 하시라고 했지. 그런데 작품 나오고 보니 (김 장관 출연 무산이)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거장의 농담에 김 장관이 무릎을 쳤다. "예. 저대신 한다 하는 소리꾼이 출연하셔서 작품 참 잘됐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죽어도 좋아"

화제는 화폭을 옮겨놓은 듯한 영상으로 옮겨갔다. 흐드러지는 매화 꽃잎 배경에 송화(오정해 분)의 소리를 들으며 군수 부친이 임종을 맞던 장면과 상전벽해(桑田碧海.'뽕나무 밭이 푸른 바다로 변한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크게 변함을 빗댄 말)를 표현한 마지막 장면은 단연 압권으로 꼽혔다. 정일성 촬영감독은 "매화비가 내리는 장면을 담기 위해 3년을 기다렸다"고 했다.

영화 <천년학>의 한 장면. 극 중 송화(오정해 분)뒤로 매화 꽃잎이 바람에 흐드러지고 있다. [사진=천년학 홈페이지]

김 장관은 "죽어도 저렇게 죽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며 찬사를 보냈다. "촬영 전에 컴퓨터 그래픽(CG) 팀을 데려가서 촬영을 하면 덧씌울 수 있겠느냐 보여주면서 시작을 했지요." 세월이 흘러 객줏집에서 재회한 송화와 동호가 소리판을 벌이고 그 위로 학 두 마리가 날던 비경은 그렇게 스크린에 담겼다. 실경과 CG의 경계를 허물어 싫지 않은 오해도 받았다. "어떤 이들은 실제 있는 신작로가 CG고, 그래픽으로 입힌 바다가 실경인 줄 알더라고." 임 감독이 말을 보탰다. "정경만 좋아서 되는 것이 아니고 바닷물이 흐르되 살아있어야 한다고 했지." 매 장면 숨 막힐 듯 아름다운 영상은 두 감독의 꼬장꼬장한 예술혼 덕에 세상 빛을 봤다.

#"젊은이들 어땠어요?"

자리가 무르익자 임 감독이 두리번두리번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이날 행사에 함께한 문화부 대학생기자단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학생들 어땠어요? 지루하지 않았어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마지막 장면 최고였어요!" "서편제가 떠올라요." 임 감독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학생들의 즉석 영화평에 귀를 열었다. "서편제를 알아요?" "영화를 보면 뭔지 모를 감동이 느껴진다 그러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이 이런 작품 보러가는 데 까지가 참 어렵지. 그렇지요?" 정 촬영감독도 젊은 관객들의 시선이 사뭇 궁금한 눈치였다. "보면 가슴에 남는 게 있다고 하는데 젊은 친구들이 이런 작품들을 보느냐 이게 문제라고." 기자와 대화를 나누던 두 감독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맥주잔을 들고 일어선 두 노장은 어느새 대학생들 틈에 자리를 잡았다. 대한민국 영화계가 '국보'로 칭하는 두 거장이 젊은이들의 거침없는 영화평을 들으며 잔을 부딪치고 있었다.

박연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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