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이 쓴 편지] 마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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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마크라고 합니다. '러브 액추얼리'의 그 많은 주인공 중에 저를 기억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그 친구 결혼식에서 비디오를 찍던,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그 비디오를 찾아 집에 찾아온 친구의 신부를 당혹케 만든, 크리스마스에 그녀를 찾아가서 말없이 피켓만으로 사랑을 고백했던….

그 장면에서 영화 내내 깔깔거리고 웃으시던 여성 관객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스크린 안에 있던 저에게까지 새어들어오더군요. 유쾌한 로맨틱 코미디에서 눈물을 짜게 만드는 유일한 캐릭터라니. 영국 총리부터 초등학생까지 모두 위대한 사랑의 승리자인 영화에서 유일하게 바라보기만 하는 사랑의 루저(loser:패배자), 그게 접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없던 저의 바보같은 사랑을 여기선 얘기하고 싶군요. 줄리엣을 처음 만난 건 조그만 파티가 열린 친구의 아파트였습니다.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세상이 환히 빛나더니 갑자기 그녀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시야에서 사라지더군요.

영화 속에서 예수가 출현할 때처럼 온통 푸른 빛으로 둘러싸인 그녀가 움직이는 곳마다 푸른 빛은 전염이 됐습니다. 정갈한 얼굴에서 미소가 번져 나올 때 차갑던 사물들이 따스한 입김으로 온기를 입었고, 하얗고 가지런한 치아 속에서 새어나오는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퍼져 저의 귓속에서 웅웅거리다가는 가슴 속에 하나 하나 보석처럼 박히더군요. 전 그때 결심했습니다. 이 여자를, 이 아름다운 모습을 평생 기억하겠노라고.

그러나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사람은 제가 아니라 저의 가장 친한 친구 녀석인 피터였습니다. "그녀를 사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하지?"라고 그가 묻는 순간, 제 사랑이 평범한 코스로 귀결되지 못하리하는 불안한 예감을 느꼈죠. 그리곤… 영화에서처럼 그들은 결혼까지 이르게 됐습니다.

제가 그들의 사랑을 저주했냐고요? 그렇진 않습니다. 제 사랑이 소중한 만큼, 사랑하는 친구의 사랑도 소중한 것이니까요. 그리고 '용기있는 자가 미녀를 얻는다'는 세상 사람들의 말이 괜시리 생겨난 게 아니잖아요. 전 그저 제 방식대로 사랑을 할 수밖에 없었죠. 그들의 결혼식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되도록 돕는 것 말이죠. 순백의 드레스 속에서 유난히 빛나던 그녀의 목덜미를, 행복에 겨워 더욱 빛나던 그녀의 미소를 기록으로 남기는 것으로요. 그것이 줄리엣을 처음 본 순간 내가 했던 결심을 평생 간직하는 길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나만 아는 세상에서 가장 큰 비밀은, 그녀가 결혼식 비디오를 보는 순간 더 이상 감춰질 수 없었죠. 결국 저는 소리 없는, 은밀한 방법으로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친구를 가슴 아프게 하지 않고 내 사랑을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키스…. 그 기억만으로도 전 세상에서 가장 큰 사랑을 얻었다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가슴아프시다고요? 원래 슬픈 사랑이 더 아름답고 오래 기억되는 거잖아요. 차마 소리내어 말할 수 없는 혼자만의 사랑을 하고 계신 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크리스마스입니다. 저처럼 너무 늦기 전에 용기를 내 고백하세요. 용기가 없다고요? 그렇다면 저처럼 은밀히 간직하는 사랑이 더 아름다운 사랑일 수도 있다는 걸 기억하세요.

이윤정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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