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경전 실감있게 재구성|고은 지음-소설 『화엄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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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고은의 장편소설 『화엄경』은 작년 여름에 처음 간행된 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독자들의 꾸준한 호응을 받고 있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문학적·사상적 가치를 고려할 때 이러한 현상은 매우 긍정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고은의 소설 『화엄경』은 『화엄경』이라는 이름의 불경 속에 「입법계품」이라는 명칭으로 들어가 있는 선재동자의 이야기를 소설화 한 것이다.
「입법계품」의 내용은 선재동자가 문수보살로부터 보신보살에 이르는 53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면서 가르침을 받고 깨달음의 사다리를 한계단 한계단 밟아 올라간 끝에 드디어 대원을 이루고 성불하기까지의 과정으로 되어있다.
여기에서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53명의 인물 가운데는 문수·보현 같이 고귀한 인물뿐 아니라 창녀와 같이 비천한 존재도 포함되어 있으며 여성의 수가 20명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조금이라도 문학적인 감수성을 지닌 이라면 이러한 면모를 가진「입법계품」의 이야기가 현대의 작가로 하여금 그것을 기초로 한 새로운 창작의 시도에로 나서게끔 충동할 만한 요소를 적지 않게 내포하고 있음을 금방 수긍할 수 있으리라.
주인공이 순결한 영혼을 지닌 소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 그 소년이 길 위를 떠돌며 체험을 축적해 가는 과정과 그 영혼이 성장해 가는 과정이 서로 나란히 가고 있다는 사실, 그 소년에게 깨달음을 위한 안내자가 되어 주는 인물들이 실로 다채로운 성분을 망라하고 있으며 그들 가운데 여성이 절반 가까운 비율을 차지한다는 사실 등등이 모두 그러한 요소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입법계품」이 아무리 그러한 요소를 담뿍 안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어디까지나 아득한 옛날에 기록된 불교 경전의 일부라는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며, 따라서 단조로운 구성과 엄숙한 설교 투의 스타일에 감금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의 작가가 이 이야기를 기초로 하여 새로운 참조의 작업에로 나설 때에는 위에서 언급한 몇가지 요소들의 매력을 일단 적극적으로 사용하되 구체적인 인물을 설정하고 사건을 전개하며 문장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는 원전의 면모에 구애받지 않고 자기 나름의 완전히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불가피하다.
이상으로 장편소설 『화엄경』의 바탕이 된「입법계품」의 개요,「입법계품」이 현대작가의 관심을 끌만한 이유, 그리고 현대의 작가가 「입법계품」을 기초로 해서 새로운 작품을 쓸 경우의 문제점 등을 간단히 짚어보았다.
이 정도의 예비 지식을 갖고서 다시 고은의 소설 『화엄경』으로 돌아라 살펴보자.
그는 「입법계품」을 소설화함에 있어 선재동자가 53명의 선지식을 차례로 찾아가 만난다는 기본골격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체적인 작품 공간을 창출해 나감에 있어서는 원전의 면모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완전한 의미에서의 환골탈태를 이룩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빛과 향기를 획득하는데 성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같은 성공을 가능케 한 비밀은 대략 세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소설 『화엄경』 이 원전에 없는 역사적·현세적 요소를 상당히 적극적인 자세로 도입함으로써 원래의 「입법계품」보다 훨씬 실감 있는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작가가 선종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있는 파격적이고 자유분방한 관점·스타일을 작품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원래의 「입법계품」보다 더욱 생동하는 성격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는 고은 특유의 화려하고 발랄한 언어가 여기에서도 거침없이 구사돼 이를테면 「고은만의 공간」이라고 일컬음직한 것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대략 세가지의 측면에서 원래의 「입법계품」을 대대적으로 손질한 결과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기에 이른 고은의 『화엄경』은 이 글의 서두에서도 말했다시피 독자들의 호응을 꾸준히 받아오고 있다. 이것은 『화엄경』이라는 소설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매력에다 동양적인 고전의 세계에 대한 독자 대중의 간절한 그리움이 덧붙여진 결과로 나타난 현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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