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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지키는「헌법 수문장」|헌재 재판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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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헌법재판소장은 대법원장, 재판관은 대법관(장관급)과 동등한 예우·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신생기관인 헌법재판소 재판관은 법관의 인사권을 행사하고 구체적 사건심리를 맡는 대법원과는 아무래도 예우면에서 차별대우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헌재 발족 이후 헌법재판소장이 대법원장과의 예우 균형상 홀대를 이유로 3부 요인을 초청하는 각종 행사에 불참했던 사례들이 이 같은 헌재의「설움」을 대변한다.
89년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려한 헌재 소장이 자리가 마련되지 않아 전날 미리 헌화와 참배를 마쳤다. 뒤늦게 자리를 마련한 행사에 또다시 참석해 두번이나 헌화, 참배한 일화는 헌법재판소와 재판관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예이기도 하다.

<예우면선 설움>
그러나 소장을 포함, 임기6년의 재판관 9명으로 구성된 헌법재판소는 출범 3년6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비추어 확고부동한 헌법기관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그동안 헌재는 89년7월 필요적 보호감호(10)를 규정한 구사회보호법 5조1항과 국회의원 입후보자 기탁금을 국고에 귀속토록 한 구국회의원 선거법 33, 34조 등에 대한 위헌결정을 시작으로 지난달 증여채무에 세금을 부과토록 한 상속세법조항을 위한 결정하기까지 모두 23건의 위헌결정을 내렸다.
헌재의 이 같은 활동은 출범초기만 하더라도 헌재의 영향력을 과소평가, 위헌심판에 안일한 대응대도를 보여오던 각 행정 부처를 초긴장 상태로 몰아넣었다.
사회보호법 위헌결정 당시에는「낌새」를 알아챈 법무부가 파문을 줄이기 위해 결정선고기일을 법개정 이후로 늦추려고 치열한 로비를 펼쳤는가 하면 제3자 개입금지를 규정한 노동쟁의 조정법 위헌 심판 때는 당시 김용준 노동부차관과 김용래 총무처장관이 직접 나서 합헌성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정은 전교조의 합법성여부가 걸려있던 사립학교 법 위헌심판이나, 국가보안법 위헌심판사건 등 시국관련사건이나, 국세기본법·토지거래허가제 등 민감한 재산권문제를 다룬 사건 등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헌재의 왕성한 활동은 입법·사법부와의 마찰을 초래, 3당 합당 이후인 지난해 4월 민자당에 의해 헌법소원의 대상을 축소하는 내용의 법 개정안이 추진됐는가하면 같은 해 10월에는 대법원 시행규칙 심사권을 놓고 팽팽한 줄다리기를 벌이기도 했다.
헌재가 기관간의 마찰과 견제 속에 홀로서기 위해서는 국가기관의 이해와 과감히 절연하고 국민의 편에 서야할 뿐 아니라 연구관 등 연구 기능을 대폭 보강하고 변형 결정의 근거마련 등 절차법의 개정 보완 작업이 시급하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각 부처 초긴장>
이론적으로는 헌법재판관 6명의 의견만 일치되면 법률의 효력을 잃게 하고 행정·입법·사법부 수장의 탄핵을 결정할 수 있는 등 막강한 지위와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신생기관인 탓에 역대 헌법재판관은 현역 재판관 9명과 지난해 정년 퇴임한 이성렬 전재판관 등 모두 10명.
이들 중 조규광 헌법재판소장과 김양균·최광률 헌법재판관 등 3명은 대통령 임명으로, 이시윤·김문희·이성렬·황도연 재판관 등 4명은 대법원장 지명으로, 나머지 변정수·한병채·김진우 재판관은 국회선출로 임명된 케이스다..
당시 여소야대 국회상황에 따라 변정수, 김진우 재판관은 각각 구평민당과 구민주당 등 야당 추천으로, 한병채 재판관은 구민정당 추천으로 재판관에 임명됐으며 이 과정에서 재판관을 추천하지 못한 당시 공화당의 심한 반발을 사기도 했었다.

<"친정 괴롭힌다">
헌법재판관은 임명과정 탓에 본인들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각 재판관들의 성향이 나 임명과정이 사건의 결정 내용과 함수 관계에 있을 수 있다는 지적도 낳고 있다.
즉 야권 추천 재판관은 진보적인 의견 개진을, 여권 추천이나 지명 재판관은 보수적 의견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통령 지명으로 임명된 재판관도 보수적이리란 선입견과는 달리 위헌심판에 있어 상당히 진보적인 의견을 개진하기도 한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전언.
관계자들은 헌재 내 유일한 검찰 출신인 김양균 재판관은 주심 사건 중 검찰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인용이 잦아「친정을 괴롭히는」재판관으로 불리기도 한다는 것.
90년1월 헌재가 노동쟁의법 제3자 개입 금지 조항에 대한 심판에서 합헌결정을 선고할 때 다수의견과는 달리 변정수 재판관은 위헌의견을, 김진우·이시윤·김양균 재판관 등 3명은 한정합헌의견을 냈었다.
변정수 재판관은 한정합헌결정이 선고된 세 차례의 국가보안법 일부조항 위헌심판에서도 줄곧 위헌의견을 냈으며 역시 합헌결정이 내려진 지난해 7월 전교조사건을 다룬 사립학교 법 위헌심판에서도 김양균 재판관과 함께 위헌의견을 냈었다.
이때도 이 시간 재판관은 한정합헌을, 나머지 재판관들은 합헌의견을 냈었다.

<여야·보혁 공존>
반대로 90년9월 헌재의 위헌결정이 내려진 국세기본법 사건에서는 조규광 헌법재판소장과 한병채 재판관은 단순합헌의견을, 또 지난달 한정합헌이 내려진 군사기밀보호법 위헌심판사건에서는 최광률·한병채·황도연 재판관 등 3명은 단순합헌의견을 냈었다.
이에 따라 관계자들은 위헌의견을 많이 낸 재판관을 진보성향으로, 한정합헌을 많이 낸 재판관을 중도성향으로, 또 단순합헌의견을 많이 낸 재판관을 보수성향으로 구분한다.
재판관들의 이력을 분석해 보면 김양균 재판관을 제외한 나머지 재판관 9명은 모두 판사출신으로 이중 서울고검장에서 자리를 옮긴 김 재판관과 수원지법원장 및 사법연수원장에서 자리를 옮긴 이시윤·황도연 재판관 등 3명은 재조영입, 나머지 7명은 변호사 개업중 임명된 재야영입 경우다.
또 현역재판관들의 출신지역을 보면 서울2, 전남2, 경남2, 경북1, 충남2명으로 비교적 고른 지역분포를 보이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조규광 헌법재판소장(65)이 법대출신이 아닌 서울대정치학과 출신으로 49년 변호사시험(3회) 에 합격한 변시 출신 법조인. 66년 서울민사지법 수석부장을 끝으로 변호사의 길에 들어서 81년 서울지방변호사회장을 거친 법조계의 원로로 요즈음도 매일 정오에 집에서 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한 뒤 산책을 즐기는 정확한 생활습관 때문에「칸트」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충남서천이 고향.
헌법재판관중 가장 많은 위헌의견을 내 헌재 내의「야당」변정수 재판관(62)은 광주서중 6년 과정을 마친 뒤 56년 고시8회에 합격, 79년까지 서울고법 등에서 판사생활을 하다 변호사개업을 했다. 85년 변협 인권위원장으로 5공의 시국사건상황을 분석한「인권보고서」를 첫 발간한 인권변호사로 유명하다.
김진우 재판관(60)은 55년 고시7회에 합격, 81년 변호사활동을 시작할 때까지 판사 생활을 했으며 79년 변협 법률문화상 수상자.

<고른 지역 분포>
한병채 재판관(59)은 국회법사위원장까지 거친 4선(8, 9, 10, 11대)의원 출신으로 헌법재판관중 유일한 고대출신이자 유일한 경북대구 출신이며 국회 문공·법사위원장을 지냈다.
이시윤 재판관(56)은 자타가 공인하는 민법의 대가로 82년 출판한「민사소송법」은 고시수험생의 필독서로 알려져 있다.
서울 출신 고시 10회로 서울대·이대 등에서 강의를 맡기도 한 학자풍 법관.
최광률 재판관(55)은 고시10회로 법관생활 7년만인 70년 변호사로 개업한 뒤 사법제도 개선을 위한 연구논문활동과 행정부처 고문변호사로 활동한 행정법 전문가.
재야시절 대법관 물망에도 오른 학구파로 변협 초대 사무총장·총무이사를 역임했으며 서울 출신.
김양균 재판관(55)은 고시1회 광주출신으로 광주·제주검사장, 광주·서울 고검장을 지낸 검사출신.
검사시절 소년법에 대한기소유예제도를 창안한 것으로 유명하며 재판관중 유일한 전남대출신.
김문희 재판관(55)은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법대에 합격한 수재형으로 고시10회. 민사관계법이론에 밝고 법원행정처 법정국장 등을 역임, 법원행정실무에도 밝은 편. 황도연재판관(58)은 전임 이성렬 재판관 후임으로 재판관에 임명됐으며 고시10회로 경남 밀양출신이다.<권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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