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교혁명 13년 "결산의 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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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서방의 회교국가들에 대한 우려가 새삼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이란이 지난 2월 11일로 회교근본주의혁명 13돌을 맞았다.
지난해말 회교근본주의 세력의 알제리 총선 석권을 회교혁명수출의 가시화로 받아들인 서방은 새로 독립한 중앙아시아 회교권국가들에 대한 이란의 접근에 터키를 내세워 대비하는 한편 연일 회교권 국가들의 핵 개발 가능성을 경고하고있다.
그러나 정작 이란은 대외적으로 레바논 내 서방인질 석방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대내적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두드러지는 등 회교근본주의의 강경 분위기로부터 상당한 이탈을 보이고 있다.
이란의 이 같은 변모는 회교율법통치·경제자립·착취근절 등 복고적인 명분에 집착한 호메이니가 사거, 회교혁명의 지주가 사라지면서 시작됐다.
호메이니 시대 10년의 정치·경제적 손실을 절감한 라프산자니 이란 대통령은 89년 대통령취임과 동시에『구호의 시대는 끝났다』는 한마디로 현실주의정책의 신호탄을 올렸다.
라프산자니는 강경파의 반발을 무릅쓰고 걸프전에서 중립을 지키고 이라크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함으로써 실리를 챙기면서 온건이미지를 과시했다. 이란은 이와 함께 시장경제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축소하고 현재 6할에 이르는 정부기업을 단계적으로 민간에 이양하는 등 민간주도경제를 추진하고 있다.
여성을 차도르와 가정 속으로 몰아넣었던 사회분위기도 차츰 풀려지고 있다. 올해 초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대통령 고문이 탄생했으며 관객을 여성만으로 제한하긴 했지만 여가수의 콘서트도 허용됐다.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던 에어로빅교실도 급증, 날씬한 몸매를 원하는 여성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있다.
회교혁명의 분위기에 휩쓸려 암흑기를 맞았던 언론과 음악업계에도 숨통이 트였다. 얼마 전까지도 정부시책 비판은 곧바로 반혁명으로 몰려 곤욕을 각오해야했던 신문·잡지들이 요즈음은 장삿속으로라도 권력자에 대한 풍자·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됐다.
그러나 라프산자니 대통령에 의해 요직에서 거의 소외된 강경파 회교근본주의자들의 반발도 만만치만은 않다. 아직도 이란의회의 다수파인 이들 강경파는 라프산자니가 이란을 회교혁명궤도로부터 이탈시켰다며 오는 4월 총선거에서 수년간의 정부시책을 심판하겠다고 호언하고 있다.
회교혁명 초기의 실책을 비판하며 온건파를 규합, 제2의 이란혁명이라 불리는 수년간의 격변을 연출한 라프산자니 대통령의 한계와 문제점이 적잖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냉전이후를 서방민주주의 대 아랍회교근본주의의 대결구도로 파악한 서방의 이란에 대한 견제가 크게 강화되고있다.
이란의 패권주의를 우려하는 서방으로부터 핵무기·미사일등의 도입 내지는 개발에 전용될 가능성이 큰 과학기술이전·장기차관제공을 받기 어려워 경제건설이 힘겹게 됐다.
국내적으로 개방정책의 부정적인 측면도 하나하나 드러나고 있다. 자율경제를 표방해온 정부의 보조금 삭감으로 소비자의 구매력이 상품가격을 따라잡지 못하는 급격한 인플레현상이 빚어지고 있다. 상점에 가득한 물건을 구경만 해야 하는 가난한 사람과 과소비문화에 빠져드는 부유층사이에 확산되는 위화감은 회교혁명의 척결표적이 다시 대두한 것을 의미한다.
회사원·공무원을 불문하고 생활고에 쫓겨 복수직업을 갖고 아랍부국 등 해외로 일자리를 찾아 나서는 사람이 부쩍 늘어난 것도 이 같은 사회변화의 한 파생이다.
이란의 한 관리는『정부의 소비절약 강조에도 불구하고 천박한 배금주의가 판을 쳐 넘쳐나는 광고에 현혹된 국민들 사이에 미국담배를 피우고 남미산 바나나를 찾는 수효가 급증하고 있다』고 우려했다.
라프산자니 대통령도 개방정책이 초래한 이 같은 부작용이 회교혁명의 이념과 상반되는 가치관의 유입에 대한 우려로 확산되는 이란내 분위기를 의식, 정치결사의 자유·남녀평등·사회복지의 충실화 등 보다 중요한 문제에는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이란의 회교근본주의혁명 13년을 결산하는 오는 4월 총선거를 통해 라프산자니의 본격적인 개혁, 혹은 회교강경파에 의한 진로 재 변혁이 이루어질지가 판가름날 것으로 보인다.

<이기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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