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전국구가 무슨 소용인가(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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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막바지에 이른 여야의 전국구 후보인선소식을 접하는 많은 유권자들의 심경은 착잡하다.
명단에 오르내리는 면면이 국민대표성이나 전문성의 기준이 미흡하다하여 느끼는 실망의 차원이 아니다. 이럴 바에야 아예 전국구 제도를 없애는 것이 더 낫지않느냐는 물음에 공감하며 분노하는 쪽이다.
인선과정과 오르내리는 인물들을 보면 이번 전국구 인선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무원칙·무정견에 국민을 안중에 두지않는 정치행태를 보이고 있다. 대통령과 여야지도자들이 기회있을 때마다 내세우던 참신성·도덕성은 아예 실종해 버렸고 대신 수상한 「거래」의 냄새만 풍기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구제도가 도입된 명분은 의회의 지역대표성이 메우기 어려운 국민대표성과 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 지역구 낙선자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의 사표도 반영해 보자는 취지가 가미되어 있다.
독일처럼 전국구 제도는 잘 운영만 하면 전문인력을 참여시켜 정치의 질을 높이는 성과를 올릴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는 여당의 안정의석 확보를 위한 도구로 주로 쓰이다가 민주화와 더불어 제1당 프리미엄이 없어지자 이번엔 정치지도자들간의 전리품처럼 운영되는 느낌이다.
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자당의 인선내용을 보아도 대의나 명분은 제쳐놓고 몇몇 정치보스들이 전국구를 철저하게 나눠 가지는 인상이다.
일일이 인물을 예거할 필요도 없이 정치에 조금만 관심을 둔 유권자들은 민자당의 전국구 명단에 지역구공천 낙천자들이 상당수 포함돼 있음을 알게 된다. 전국구가 전국민을 상대로한 인재충원제도가 아니라 계파간의 고충처리를 위한 수단처럼 운영되고 있는 것이다. 직능대표의 비율이 현저히 줄었고 그나마 직능대표로 내세운 사람도 그 직능의 대표성이 의심스러운 경우가 많다.
지역구 낙천자,보스와 인연있는 사람들을 살리려다 보니 전국구에 꼭 들어가야 할 직능대표쪽이 밀려난 것이다.
또 이번 민자당 전국구공천은 3당합당이 정국안정이란 명분과 관계없이 그 저변에 감추고 있는 야합성을 보여준다.
명단에 오른 대상들이 저마다 잡은 줄에 따라 기준도,접근방법도 다르기 때문이다. 누구는 어느 계파보스가 신세갚는 케이스고,누구는 누구의 돈줄과 관계있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심각한건 전국구가 드디어 여당에서마저 돈줄과 연결된듯한 흔적을 나타내는 점이다. 야당이 노골적으로 30억이다,50억이다 하는 판에 여당에마저 일부 보스의 정치자금 확보를 위한 금품거래설이 나돌고 있으니 대외적으로도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정치는 현실이라고 하지만 현실을 이상에 접근시키는 노력은 아예 외면하고 현실의 혼탁상을 정치가 앞장서 부채질한대서야 말이 되는가. 이렇게 제도 원래의 취지나 명분을 외면한채 국민의사와 상관없이 운영하면 전국구 제도의 폐지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정치인들은 스스로 설 땅을 좁히는 정치혐오에 앞장서고 있음을 깊이 각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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