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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암살 미수사건:상(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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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46년 평양역광장/3·1절행사때 날아든 수류탄/김 연설 끝나자 군중속에서 청년이 투척/소 경비장교가 주워던지려는 순간 “꽝”/증언자 김세일씨
신탁통치 찬·반폭풍으로 벌집 쑤셔놓은듯 걷잡을 수 없었던 북쪽 정국은 46년 2월 민족지도자 고당 조만식선생이 소군정에 의해 감금되자 그를 따르던 민족(민주)·지주·청년계열 인사들이 대거 월남해 평온을 되찾으면서 찬탁일색으로 줄기를 잡아나갔다.
소군정은 이런 분위기를 확대·정착시키기위해 해방후 첫 3·1절을 맞아 평양역전 광장에서 사회주의식 대규모 군중대회를 구상해놓고 있었다.
○소군정 수뇌도 참석
이 군중대회는 소군정 이후 두번째(첫번째는 45년 10월14일 「김일성 환영대회」)다.
그러나 북쪽의 평온은 어디까지나 외형상의 평온이었을 뿐 수면하에서는 45년 11월 신의주 학생봉기이후 신탁통치·조만식감금 등에 반발해 지하로 잠입 또는 월남했던 학생·청년·종교인·지식인 등이 치밀한 반소·반공운동계획을 세워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3월에 접어들면서 북쪽의 전지역에서 크고 작은 반소·반공사건이 잇따랐다.
이들 사건중에서도 김일성과 소군정 최고지도부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것은 평양역앞 광장에서 3·1절 기념행사에 참가한 김일성과 소련군 고위장성들에게 수류탄을 던진 사건이었다.
해방 7개월이 지난 46년 3월1일 평양역앞 광장에는 아침부터 공산당원·각 직능단체회원·학생·시민 등이 모여들고 있었다. 소군정의 지도아래 공산당과 임시인민위 등이 해방후 처음으로 맞는 3·1절 기념행사를 위해 조직적으로 동원됐기 때문이었다.
봄의 문턱이었지만 약간 쌀쌀한 날씨속에 역앞 광장의 확성기를 통해 「김일성장군의 노래」가 울려퍼지고 있었다.
오전 11시가 가까워오자 역앞 광장은 군중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기념행사는 예정대로 오전 11시 정각에 시작됐다.
주석단 한복판에는 소 25군참모장 벤코프스키 중장·정치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민정사령관 로마넨코 소장 등 소군정 고위장성들이,좌우 양쪽에는 김일성의 양팔역을 맡았던 평양정치군사학원 원장 김책과 임시인민위 보안국장 최용건을 비롯,임시인민위 부위원장 김두봉,서기장 강양욱·선거부장 오기섭·여성동맹위원장 박정애·사법국장 최용달 등이 각각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석단 주위는 정·사복 소련군인들과 보안대원 50여명이 경비했다.
○연단계단에 떨어져
이 행사를 지켜 보았던 전 북한 외무성부상 박길룡씨는 당시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군정기관지 조선신문사 편집국장 최철환(후에 내각사무국장등을 지내다 숙청),기자 김세일 등과 함께 평양역광장 바로 옆에 있었던 조선신문사건물(일제때 평양매일신문사) 옥상에서 이 행사를 구경하고있었습니다. 우리는 군중들이 6만·7만명은 족히 되겠다고 입을 모았읍니다. 11시5분전 쯤이었습니다. 보안국 소속 악대의 환영곡 연주가 시작되고 소련제 고급승용차 2대가 주석단 아래까지 달려와 멈췄습니다. 문일(김일성 비서)이 선두차로 달려가 차문을 열자 양복차림의 김일성이 내리더군요. 이어 소련군 헌병장교가 뒤차의 문을 열고 거수경례를 하자 장군복차림의 치스차코프 대장이 내렸습니다. 그 주위는 소련군 헌병들이 뺑 둘러서 호위하고 있었고요. 김일성이 치스차코프 옆으로 다가가 공손한 태도로 주석단으로 안내했습니다. 치스차코프와 김일성이 주석단 중앙의 빈자리에 앉은후 김용범의 사회로 기념행사가 시작됐습니다. 이날 김일성의 연설문은 「소련파」 문학평론가 기석복(48년 노동신문 주필·당상무위원,56년 문화성부상,숙청돼 소련망명후 사망)이 작성해 소군정의 검열을 받은 것이지요. 나는 끝까지 이 행사를 보지 못하고 바쁜 일이 있어 당시 내가 일했던 소군정 사령부로 갔습니다.』
박길룡씨와 함께 신문사건물 옥상에서 이 행사를 끝까지 취재했던 소설 『홍범도』 작가 김세일씨(80·소련작가협회 회원·모스크바거주)는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회고하고 있다.
『사회자가 김두봉을 소개하자 김두봉이 마이크 앞으로 다가가 약 3분동안 짤막한 개회사를 했습니다. 다시 사회자가 「다음에는 우리 인민의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장군님의 연설이 있겠습니다」며 김일성을 소개했습니다. 군중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으며 연단에 선 김일성은 준비한 원고를 차분히 읽어 내려 갔습니다. 김일성의 연설에 이어 임시인민위 총무부장 이주연(상업상·재정상·부수상 등을 지내다 69년 8월 67세로 병사)이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업무보고를 끝내고 시가행진에 들어가기 직전이었습니다. 각 단체가 구호를 외치고 김일성이 단상에서 손을 흔들고 있었을 때였지요. 연단 바로 밑 부근에서 18세 정도의 청년이 김일성을 향해 「이상한 물체」를 던졌습니다. 이 물체는 김일성이 서있는 주석단에 이르지 못하고 주석단 바로 아래 연단계단에 떨어졌습니다. 수류탄이었어요. 경호를 보고 있던 소련군 노비첸코 소위 한발 앞이었지요. 노비첸코 소위가 재빨리 이 수류탄을 주워 되던지려는 순간 요란한 폭음과 함께 그의 손에서 폭발하여 오른손이 날아가고 왼손의 뼈와 발가락이 파열되고 가슴팍과 얼굴에 심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주석단의 고위인사들은 혼비백산해 연단아래로 피신했고 군중들 역시 피신하느라 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잠시후 현장부근에서 소련군인들에 의해 범인이 잡혔습니다.
주석단 아래로 내려온 치스차코프와 김일성 등은 소련군 헌병들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행사장을 떠났고 피투성이가 된 노비첸코 소위는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이어 사회자가 연단에 나타나 군중들에게 사건의 경위를 설명하고 안심시킨후 단체별로 대열을 정리,온갖 구호를 외치며 노동자·농민이 선두가 되고 학생들이 그 뒤를 따르는 시가행진에 들어갔습니다.』
○현장에서 붙잡혀
이 기념행사의 지도책임을 맡았던 소군정 정치담당관 메크레르씨의 회고.
『김일성 연설도중 계단 경비를 맡은 노비첸코 소위가 한 청년과 승강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노비첸코가 계단에 걸터앉으려는 청년을 제지하자 청년은 「우리의 3·1절행사에 소련군인이 무슨 자격으로 여기에 나와있느냐」며 대들었고 조선말을 할줄 아는 내가 「우리는 너희들의 조국을 일제로부터 해방시켜 준 해방군이다」며 그 청년을 밀어냈습니다.
연단 바로 아래는 사과를 던져도 땅에 떨어질 수 없을 만큼 사람들이 운집했습니다. 잠시후 그 청년이 수류탄을 노비첸코 앞으로 던진 것이지요. 노비첸코는 연단가에 서서 시비를 걸어왔던 그 청년을 주시하고 있었고 그가 옆사람을 비집고 호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는 순간을 목격,계단에 잘못 떨어진 수류탄을 민첩하게 주웠기 때문에 엄청난 사고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내 기억으로는 잘못 장치된 수류탄이어서 노비첸코의 팔하나 정도의 피해에 그친 것입니다. 곧 소련군 특무대와 임시인민위 보안대가 총동원되어 이 사건의 주동자 검거에 나서 용의자로 보이는 40여명의 학생·청년들을 검거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상대로 테러단의 배후를 캐는데 집중했습니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기자
유영구기자
안성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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