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의서 실천 의지없는 북한(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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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화해와 협력으로 갈길은 멀다. 남북한 합의서를 발효시킴으로써 역사적인 계기로 평가받아야 할 평양의 6차 고위급회담이 고작 이처럼 해묵은 냉전시대의 논리를 연상시킨다.
합의서가 발효되기는 했으나 이를 실현해 가는 방법과 과정에 대해 남북한의 기본적인 시각이 전혀 좁혀지지 않았음을 이번 회담은 보여 주었다. 특히 북한측은 말과 문서상으로는 화해와 협력을 다짐하면서도 실제 생각과 행동은 그렇지 않음을 드러냈다.
북한의 그러한 입장은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엿볼 수 있다. 하나는 조속히 해결하기로 약속했던 핵문제에 대해 최대한으로 시간을 지연시키기 위해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논리와 구실로 장애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김일성 주석과 연형묵 총리의 말에서 나타나고 있는 아직도 낡은 대남정책의 미련이다.
남한측이 합의서에 규정한 것처럼 정치·군사,경제·문화교류,인적왕래등 여러차원의 접촉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며 남북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려는데 반해 북한측은 정치·군사문제가 선결되어야 한다는 입장에 조금도 변함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특히 핵사찰 문제에 대한 북한의 기본입장으로 보아 남북한 관계는 북한측의 극적인 정책의 전환이 없는한 합의서 이행문제를 둘러싼 토의와 줄다리기로 일관할 가능성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측이 제안한 동시 시범사찰에 대해 영변의 핵시설 하나와 남한에 있는 모든 미군기지를 동시 사찰해야 한다고 내놓은 주장은 이 단계에서 사찰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사 표시로 보인다.
오랜 궁리끝에 마련한 것으로 보이는 이 제안은 우선 미국과 직접 대화하겠다는 속셈도 있고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어 가능하면 합의서의 실질적인 이행을 늦추어 보자는 의도도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을 어떠한 형태로든 협상상대로 끌고 들어가려는 고리로 삼겠다는 의도다.
북한이 합의서의 실천보다는 다른 정치적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삼겠다는 의도는 김일성과 연형묵의 주한미군 철수 주장과 구속인사 석방문제,보안법 철폐요구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이들 문제를 합의서 이행과 간접적으로 연계시킴으로써 새로운 장애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연총리가 기조연설에서 「우리는 일괄합의·동시실천의 원칙이 가장 합리적인 방도라고 인정하고 있다」고 말한 내용이다.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단계적으로 실현가능한 쉬운 문제부터 풀어나가자는 합의서의 정신과 어긋날 뿐더러 그 원칙대로 한다면 합의서는 실현불가능한 문서로만 될 우려도 있다.
각 공동위원회에서 합의가 되더라도 다른 문제 해결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실질적인 관계 발전은 요원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일괄타결될 때까지는 「비방·중상을 하지 않는다」는 합의서 조항도 유효하지 않다는 억지 논리도 성립할 수 있다.
이처럼 핵사찰문제,합의서의 실질적인 이행문제에 관해 북한의 의도가 분명해진 이상 정부로서는 보다 효과적인 대북정책을 마련해야할 것이다. 북한의 그러한 낡은 수단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도록 이제는 보다 단호한 태도를 보일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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