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대비위한 긴급진단(벼랑에선 교육: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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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인문고 졸업생 50만 절반이나 “갈데 없다”/공업고 가고싶어도 수용능력 태부족/산업화에 걸맞는 직업교육체제 시급/진로교육 부재
올해 서울K고를 졸업한 박모군(19)은 고3이던 지난해 봄 대학진학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인생의 진로를 바꾸었다. 인문고 직업교육위탁학교인 서울직업학교에 등록,전혀 생소한 선반기술을 배워 기능사 자격증을 얻고 올봄 서울 구로공단의 D정밀에 일자리를 얻었다.
『아무 생각없이 인문고로 진학한뒤 성적이 낮아 괴로웠었는데 직업학교에 입학한후 새로운 세계를 접하고는 용기를 얻었어요.』
박군은 『중학교때 일찌감치 진로를 바로 정했더라면 인문고로 진학해 허송세월을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아쉬워 한다.
○사회변화 못따라가
우리 교육현장에선 박군같은 시행착오는 그러나 하나 둘이 아니다. 대규모로 되풀이 된다. 그러고도 고쳐질 전망이 흐리다.
사회변화나 인력수요와는 동떨어진 경직된 학제와 안목없는 땜질시책이 그 원인이다.
산업화에 비례해서 보다 다양하고 전문화된 기술영역과 직업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회는 그런 인력을 필요로 하지만 교육체계는 산업화이전의 제도와 틀에서 한발짝도 내디딜 생각을 못해왔다.
그 결과 교육의 큰 목표중 하나인 생계수단의 보장,직업의 획득이란 차원에서도 구조적인 직무유기상태에 빠져있다.
초창기부터 지금까지 일관되어온 인문 위주 정책이 구조적 모순의 핵심이다. 여기에는 우리문화전통,국민의식 등이 상호작용한 것이지만 정부시책은 그같은 왜곡상황의 시정이나 장기적인 방향제시의 안목없이 그같은 상황을 부채질 해왔다.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실업계 고교의 비율이 70년 48%에서 80년 45%,90년에는 32%로 오히려 줄어든 것만을 보아도 그같은 사정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실업계 고교중에서도 상업계가 62%인 반면 공업계는 28%에 불과해 계열간의 심한 불균형을 빚고 있으며 그 결과 최근의 산업인력난을 가중시켰다.
올해의 경우 7만5천명 정원의 공업계 고교의 지원자가 6만8천명이나 탈락했다는 사실 하나에서도 진로교육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여건임을 잘 알 수 있다.
그래서 해마다 쏟아지는 인문고 졸업생 50만명 가운데 적어도 20만명이상이 대학도 못가고 취업교육도 받지 못한채 사회에 「버려지고」있다. 재수를 하든가 알아서 취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는 이같은 구조적 문제가 학생들의 진로교육은 물론 산업인력수급 정책에 차질을 빚는 원인이라고 파악,95년까지 인문고교대 실업고교의 비율을 현재의 66대34에서 50대50으로 전환한다는 계획이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예산지원의 부족과 인문계 선호라는 국민의식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문고생중 미진학자를 위해 마련된 직업위탁교육도 올해 1만2백명이 희망했지만 전국 7개 직업학교의 수용능력이 모자라 절반가량인 5천2백여명만 입교했다.
인문계고교와 실업계고교간의 이동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배제해놓고 있는데다 실업계의 경우 계속 교육의 기회가 제한돼 있는 것도 직업교육측면의 진로지도를 제한하는 커다란 장애가 되고 있다.
교육전문가들은 학교에서 진로교육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현재의 인문계중심 교육체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한다.
○중학때부터 지도를
장석민 교육개발원 직업교육연구부장은 『우리의 경우 실업계 고교를 포함해 기술학교·전문대·개방대등 직업계통의 학교가 있기는 하나 이들 학교들은 모두 인문교육중심의 기간학제에 덧붙여져 부수적으로 운영되고 있어 단계별로 연계교육이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장부장은 『실업계고­전문대(2년과정)­기술대(2년과정의 직업교육대)­대학원으로 이어지는 직업교육체제를 새로 만들어 직업교육을 체계있게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업계고교 진학을 기피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대학진학은 물론 계속 교육의 기회가 사실상 차단되는 「막다른 골목」식의 학제로 운영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또 고등학교 단계에서 대학진학을 위한 인문과정과 취업을 위한 실업과정이 분리되는 현행 학제 아래에서 그나마 진로교육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중학교 과정에서 진로교육이 본격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민학교 과정에서 직업세계에 대한 인식이 싹트고 중학교에서는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다양하게 확인하면서 직업세계를 탐색하며 고교과정에서 잠정적인 진로선택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진로교육체제에 맞춰 교육과정이 짜여져 있는 것이 선진국들의 예이지만 우리는 전혀 다르다.
81년 4차교육과정부터 중학교 도덕에 일부 삽입됐으나 직업윤리등 추상적인 것에 불과해 진로지도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다.
한국교총이 지난해 6월부터 7월까지 한달동안 전국 일선 교사 1천5백명,학생 1천5백명등 모두 3천명을 대상으로 중학교에서의 진로지도 실태를 설문조사한 것에 따르면 「진학·취업정보제공의 정도」에 57.3%가 「부족하다」고 응답했고 「매우 충분」은 1.2%에 불과했다.
광운중 교사 전익배씨는 『중학교에서 진로 지도를 체계적으로 시키려고 해도 교재나 프로그램이 없을뿐더러 정보조차도 제대로 접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고 『진로교육에 관심은 갖고 있으나 프로그램을 따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엄두를 못내고 있다』고 털어놨다. 진로지도교사의 체계적인 양성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사의 전문성결여도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현재 중·고등학교에서의 진로지도는 대개 담임이 맡고 있고 전문교사가 있는 경우 집단지도 형식으로 진로지도를 하고 있다.
○전담교사도 “겉치레”
진로지도 교사는 주로 공립학교에 배치되고 그나마 진로지도 보다 생활지도 등 학교업무전반을 맡고 있어 전문적인 지도는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고 담임의 경우도 성적관리·진학지도에 전념하고 있는 형편이다.
교육부는 최근 95년 실시되는 제6차 교육과정 개편작업에서야 비로소 중학교 3학년과정에 「생활과 직업」이라는 과목을 신설,진로교육 채비를 서두르고 있는 실정이다.
이때문에 교육현장에서는 진로지도는 필요에 따라 형식적이고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다.
이무근 서울대 교수는 『학교에서 진로 교육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모든 교사가 자신의 교과영역에서 진로지도교사가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든 교사는 담당과목과 관련해 앞으로 취업할 수 있는 직업세계에 대해 수업시간에 원래의 교육목표와 더불어 설명해야 한다는 것이다.<정재헌기자>
◎대만은 중학졸업생 70%가 실업고로 진학/장석민씨 한국교육개발원 직업지도연구부장(전문가 진단)
산업화에 성공한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기술인력을 안정적으로 양성·공급하는데 있어서 유리한 직업교육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독일은 중등단계의 직업교육제도를,영국은 고등교육 단계의 직업교육제도를,그리고 대만은 전체 교육제도를 직업교육 중심으로 잘 운영하고 있다.
이들 공업 선진국은 우리나라 직업교육 제도개선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독일에서는 우리나라의 국민학교에 해당하는 4년제 기초학교(Gruntschule)를 마치면 학문적 재능이 뛰어난 소수의 학생들만이 인문계 중등학교(Gymnasium)에 진학하고 우수한 학생들을 포함하여 나머지 70∼80%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실업계통의 학교로 진학한다.
실업계통의 학교에서는 중학교 단계에서 예비직업교육 기회를 제공하고,고등학교단계부터 본격적인 직업교육을 실시한다. 독일은 직업학교가 이론지도와 교양교육을 맡고,사업체가 실기·실습지도를 맡는 방식으로 이원화하고 있다.
직업계통의 학교를 졸업한 기능인들은 궁극적으로 마이스터(meister)가 될 수 있다. 독일의 마이스터는 최고의 기능 보유자로서 존경 받으며 산업체에서는 중견간부로서,중소기업 또는 작은 업체의 주인으로서,중산층 이상이 사회적 지위를 갖는다.
영국은 산업발전에 필요한 고급기술인력을 양성하기 위하여 학문중심의 기존대학(University)과는 대조되는 독특한 형태의 종합기술대학(Polytechnic)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영국은 고등학교까지의 교육이 보편화된 이후 대학교육에 대한 사회적 요구가 높아지고,산업기술인력의 고급화가 불가피해지자 1960년대말 기존대학의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폴리테크닉을 전국에 걸쳐 설립하였다.
폴리테크닉은 보통 능력의 청소년,직장인,성인을 받아들여 직업기술,응용기술,실무기술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연구와 강의를 철저하게 산학협동방식에 기초하여 운영한다.
영국의 폴리테크닉은 기능인들에게 다양한 형태로 예컨대 야간제,주간제,시간제,상하순환교육제(Sandwitch System)등 고등교육의 기회를 개방하여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과 동시에 산업기술 인력의 고급화를 꾀하고,산업체와 공동으로 연구하고 교육함으로써 산업발전에 직결된 대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대만은 고등학교 단계부터 다양한 직업계통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중학교를 졸업하면 70% 이상이 직업계통 학교로 진학하도록 되어 있다. 대만은 전체교육제도를 직업교육 중심으로 정착시킴으로써 인력의 인문화 경향을 조기에 차단하고 전국민의 기술인력화에 성공하고 있다.
50년대에 대만은 중학교 졸업수준의 기초기능인력 양성에 역점을 두었다. 60년대에는 실업계고교를 확충함으로써 제조업발전에 필요한 기능인력 양성이 튼튼한 기반을 구축하였고 70년대에는 공업중진국으로서 필요로 하는 중간기술인력의 양성을 위하여 전문대학을 확충하였다. 그리고 8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고도 산업사회로 진입하기 위해 필요한 고급기술인력의 양성과 기존 기능인력의 고급화를 위하여 기술대학(Institute of chnology:영국의 폴리테크닉과 비슷함)을 확충하는데 노력하였다.
실업계 고교,전문대학 및 기술대학의 단계적 설립과 확충을 통하여 대만은 직업교육을 위한 계속 교육체계를 완성하고 산업발전의 단계에 맞게 기술인력의 고급화를 꾀해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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