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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내세워 김을 지도자로(비록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40)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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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일성 선택과 소군부 역할:하/이승만 귀국알고 서둘러 입북시켜/토지개혁등도 김의 이름으로 추진
평양주둔 소 25군 사령부는 제1전선군 군사정치위원 스티코프상장의 「절대비밀」지시를 하나하나 실행에 옮겼다.
스티코프는 김일성을 입북시킨후에도 자신의 지시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는지를 여러차례 25군정치사령관 레베데프소장에게 전화로 확인했다.
「스티코프의 지시=스탈린지시」로 인식했던 소군정최고지도부의 김일성에 대한 예우는 「대위 김일성」의 차원이 아니었다.
그러나 소군정의 소비예트화 정치일정대로 33세의 청년 김일성에게당·정을 장악케하는 길목에는 많은 걸림돌이 놓여 있었다.
전소25군정치사령관 레베데프소장의 회고.
『김일성 입북후 안 사실입니다. 바시리예프스키와 메레츠코프원수,스티코프상장등 극동군 최고지도부는 대일전부터 조선에서의 김일성 활용방안」(활용방안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회피)을 구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을 해방한달여후인 1945년 9월18일에 입북시킬 계획은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25군을 주축으로 한 군정을 세우고 나서 조선의 실정 등을 완전히 파악한후 정지작업이 끝나면 입북시키려고 했었지요. 당초 계획과 달리 김일성의 입북이 빨라진 것은 「미국에 있는 이승만이 곧 귀국할 예정」이라는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 정보는 미국이 이승만을 「친미인사」로 낙점,장차 조선의 지도자로 양성하려한다는 정보에 자극을 받은것 같습니다. 이에 따라 소군부도 김일성을 「소련측 대리인」으로 낙점,서둘러 입북시킨 것입니다. 때문에 소군정의 김일성에 대한 사전준비가 없었던 상황에서 김의 정치적 부상과정에는 많은 고충이 따랐습니다. 우선 인민들의 절대적인 추앙을 받고 있는 조만식등 민주 민족계열과 청년층,그리고 해방과 함께 조직의 골간을 형성해 놓은 박헌영 계열의 조선공산당을 회유,설득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조만식 회유 실패
해방 10여일후부터 평양에 주둔,군정사령부를 차린 25군은 토착공산주의자 김용범·박정애 부부 등을 앞세워 조만식의 민족계열을 끌어 들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무엇보다도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대장을 비롯,정치사령관 레베데프 소장등 지도부가 북한의 지역실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입북했고 생활환경이 크게 다른데다 언어소통이 제대로 안돼 허덕거릴 수 밖에 없었다.
레베데프장군의 회고 계속.
『솔직히 군정초반기 스티코프의 「지상명령」인 김일성의 입북후 그를 내세워 소비예트화정권을 세우기에는 25군만으로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스티코프에게 긴급 인력충원을 요청했지요.
전문정치일꾼 로마넨코소장·이그나치프대좌등 35군 고위장성들이 즉시 평양에 들어와 군정에 가담했습니다. 그리고 조선말과 조선의 실정을 잘아는 소련거주 고려인들(일명 「소련파」)을 대거 입북시켰습니다. 이들 고려인들은 소련에서 입북할때 소련정부로부터 「김일성을 적극 지원하라」는 「비밀지시」를 받았습니다. 김일성 정권창출에 고려인들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도 50년대말까지 이들 고려인들은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거나 소련으로 망명하는 비극을 겪어야 했지요.』
소군정에는 레베데프가 이끄는 정치사령부외에 로마넨코의 민정사령부(일명 로마넨코사령부)등이 설치됐고 허가이 등 유능한 고려인출신 정치일꾼들의 입북으로 활기를 되찾았다.
레베데프장군의 회고 계속.
『처음 평양에 들어온 김일성 대위는 특별히 뛰어난 군인도,탁월한 혁명가도 아닌 청년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그는 국내 기반이 일천해 정치활동을 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빠른 시일내에 자신의 위상을 구축했습니다.
○김,계략에 뛰어나
비록 소군정의 적극적인 지원이 있었지만 그의 정치적 계략,정치적 리더십 등은 비범했습니다. 김일성에게는 1945년 10월14일이 역사적인 날입니다. 소군부가 이날 그를 사실상 장차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지명했기 때문입니다. 이날 군중대회에서 그는 성공적으로 인민들에게 선을 보였고 이날부터 그의 위상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소군정의 지원으로 김일성이 최고지도자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항일투쟁 김일성장군」으로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진 지명도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이같은 「명성」을 최대로 활용해 양손에 당(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 책임비서)과 행정권(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쥐어 준후 「민주개혁」을 추진케 했습니다. 군정은 당시 조선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무산계급층인 인민들이 가장 갈망하는 토지개혁조치를 비롯,8시간노동제,남녀평등,은행·기업소등의 국유화조치안 등을 마련해 김일성 이름으로 발표케하고 강력히 시행하도록 지원했습니다. 신탁통치문제로 우리와 결별한 조만식을 고려호텔에 감금하자 대부분의 지주·지식층·민주 민족계열 인사들이 대거 월남해 버렸기 때문에 토지개혁을 시행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습니다(함흥학생 시위사건등 일부 청년·학생층의 집단반발은 있었지만­).
이 토지개혁안 등은 허가이·김찬·기석복등 고려인 출신들이 소군정의 지도아래 소련의 방식을 그대로 번역해 지역실정에 맞게 수정한 것입니다.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상부의 지시에 따라 나는 고려호텔에 감금돼 있는 조만식에게 사람을 보내 「후견제(신탁통치)를 찬성만 하면 아직도 기회가 있다」는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고집쟁이 영감(그는 조만식을 항상 이렇게 표현)은 「이런 메시지를 갖고 오려면 앞으로 나에게 나타나지 말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아마 이 메시지가 소군정지도부의 마지막 메시지였을 겁니다. 그후 김일성 진영에서 몇차례 사람을 보내 그의 심경변화를 타진했으나 실패,경비를 강화했습니다. 여러번 강조하지만 소련은 어느시기까지는 조만식을 조선의 지도자로 옹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원래 소련정책은 초기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를 불문하고 인민의 추앙을 받는 인물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산주의자들이 막후에서 그들을 조종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해 왔기 때문입니다.』 소군정의 막후실력자로 초창기 「김일성 담당관」(당시 소군정에서는 정치담당관인 메크레르씨를 이렇게 불렀다)이었던 메크레르씨는 『군정지도부는 비록 상부의 강력한 지시에 따라 김일성을 최고지도자로 지원했지만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소련의 명령에 충실했고 정치적 계략과 순발력이 뛰어났던 사람』이라며 김일성에 대해 레베데프장군과 같은 평가를 했다.
메크레르씨의 회고.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사회주의정책·당조직등에 대한 학식을 갖추지는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정치적 리더십과 계략은 뛰어났습니다. 새파란 청년이 정치적 현안들이 있을때마다 주요인사들을 「요정」(메르레르씨는 예쁜 여자들이 있는 고급 음식점으로 표현)으로 초청해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문제를 풀어 나갔습니다. 그의 「요정정치」는 조만식은 물론이고 김용범·오기섭등 국내 공산계열지도자들로선 상상할 수도 없는 발상이었습니다. 또 초기 김일성의 장점중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항일정신이었습니다. 해방직후라 전인민들의 감정도 그러했지만 그는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당과 임시인민위원회 등의 중간 간부로 천거된 사람중 친일 냄새만 나면 철저히 배재했습니다.
○박,고집센 혁명가
내가 여러차례 밀실에서 담화했던 박헌영은 김일성과 달랐습니다. 그는 이론에 밝은 공산주의자임에는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원칙과 이론에 근거한 주장만을 내세우는 고집센 혁명가였지요. 때로는 소련의 고위장성들에게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런 점이 단순한 군인들의 눈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에 대한 나의 보고서 역시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지 않았지만­.』
레베데프장군과 메크레르씨는 『김일성이 북한의 최고지도자가 되는 것은 결과적으로 역사였다』며 『그는 6·25전쟁전 「통역정치」또는 「고문정치」시기까지 자기에게 맡겨진 사회주의 과업을 비교적 무리없이 실행한 지도자였지만 그 이후 6·25전쟁과 숙청·개인우상화등 실정으로 점철된 정치인이 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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