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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자김」은 소극동군 작품(비록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3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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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일성선택과 소군부 역할:상/스탈린 총애받은 스티코프가 주도/김 입북 한달전 부하보내 정지작업
소련군정이 33세의 청년 소련군 대위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선택한 과정과 그 경위에 대해서는 몇차례의 조명이 시도됐다.
소련군 고위지도부가 사전에 김일성을 북한의 최고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내정해서 입북시키고 마침내 그를 최고지도자로 추대했다. 그 과정에서 소련군부의 역할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1945년 8월 북한을 점령하고 공산정권창출의 주역을 맡았던 소련군정 고위 장성들 가운데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전소25군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일명 정치사령관)NG레베데프 소장(90·모스크바거주)은 북한정권창출과정과 김일성의 추천배경을 비로소 털어놨다(본
보 91년 11월30일자 참조). 그의 증언을 토대로 소련군부의 의도와 김일성추천과정을 되짚어 보면 김일성 성공의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소련군의 선택이었음이 분명히 드러난다.
레베데프 장군은 『소련 극동군 소속 고위장성들이 대일전을 끝낸후항일 유격대장 출신으로 소련군 제88특별정찰여단에 있던 김일성 대위를 장차 조선의 주요 지도자중 한 사람으로 꼽아 입북시킨 것은 숨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솔직히 털어놨다. 퇴역장성으로 지난해 12월 2일 90회 생일을 맞은 그는 함구해왔던 북조선의 창건비사를 힘들게 회고해냈다.
소25군 정치담당관이었던 메크레르씨도 그동안 모호했던 증언들을 떨치고 『상부(상관)로부터 김일성의 정치적 부상과 활동 및 지원계획 등을 세우라는 「긴급명령」을 받고 김일성보다 한달 먼저 평양에 급파됐었다』며 레베데프 장군의 증언을 뒷받침했다.
○극비리 전통시달
레베데프장군의 회고
『소25군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이었던 나는 대일전에 직접 참전했습니다. 복장은 군인이지만 모스크바 중앙당의 지시를 받는 정치일꾼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소속은 25군이었으나 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대장의 지휘를 받지 않고 극동군사령부 예하 제1전선군사령부 군사회의 군사정치위원 TF스티코프상장(우리의 중장·후에 대장으로 승진)의 지휘를 받아야 합니다. 청진·함흥 등지를 거쳐 평양에 도착한 2∼3일후인 1945년 8월말로 기억합니다. 직속상관인 스티코프로부터 긴급한 전화(중간에서 도청이 불가능한 군전용 무선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한달여후쯤 제88특별정찰여단의 김일성 대위를 평양에 들여 보낼테니 그에게 주택과 자동차·생필품 등을 지급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순간 나는 일개 대위에게 주택과 자동차를 지급하라는 이 지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며칠전 함흥에서 「평양에 들어가면 민족주의자 조만식을 설득해 끌어 들이고 국내공산주의자 김용범·박정애·오기섭(지금까지 오기섭으로 표기했으나 소련에서 발굴한 1947년 북한자료에 오기섭으로 표기,바로잡음 등을 잘 활용하라」는 전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전통에 따라 치스차코프 대장과 나는 평양에 들어가자마자 조만식을 만나 해방후 조선문제를 심도있게 협의하고 있었습니다.』
레베데프 장군은 그러나 다음날 제1전선군사령부 군사회의 참모들을 통해 「스티코프의 지시」에 담긴 뜻을 읽어냈다.
당시 스티코프는 수십명의 극동군 고위 장성들중 가장 스탈린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장군이었다.
스티코프는 30대에 소련공산당 레닌그라드주당에 입당한후 줄곧 출세가도를 달려 스탈린 후계자로 지목될 정도로 소련공산당내의 실력자로 알려진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 주다노프(후에 암살당함)밑에서 제2서기를 맡았다.
스티코프는 특히 1936년 스탈린헌법 제정때 중앙당대회에서 헌법기초위원인 주다노프의 제안연설에 이어 찬조연설을 하면서 「스탈린대원수는 전 인류의 태양」이란 말을 처음으로 사용,스탈린으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후 스탈린이 레닌그라드에 시찰나갈 때면 으레 스티코프를 찾을 정도였다.
○“경호원 붙여라”
레베데프 장군의 회고 계속.
『첫번째 전화지시가 떨어진 1주일후였습니다. 그러니까 45년 9월 초순이지요. 역시 연해주의 스티코프로부터 긴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김일성이 평양에 도착하면 그를 공산당에 입당시키고,소련군 장교로 구성된 경호원들을 붙일 것,그리고 비밀리에 지방순회를 시켜 각계의 유지를 만날 수 있도록 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레베데프 장군의 이같은 증언은 당시 「김일성의 그림자」,또는 「김일성 담당관」으로 불렸던 메크레르씨의 회고와 맞아 떨어진다.
연해주에서 직속상관 스티코프의 명령을 받은 메크레르 중좌는 제88특별정찰여단에 들어가 김일성 등을 면접한후 9월 초순 김일성에 앞서 평양에 들어가 김일성의 입북후 정치활동 등에 대한 사전준비를 시작했다.
그는 김일성이 입북하자 민족지도자 고당 조만식을 대면시켰고 김일성과 함께 극비리에 지방도시를 순회하며 해방후 북한의 정세를 파악했다.
메크레르씨의 증언.
『고려인 출신 강미하일 소좌와 나는 스티코프의 「특명」을 받고 평양에 들어가 25군사령부의 지원을 받아 김일성 입북후의 정치활동 준비작업을 했습니다. 조선실정을 잘 모르는 우리는 주로 김용범·박정애 부부등 국내 공산주의자들의 협력을 받았습니다. 초창기 내가 작성했던 김일성의 정치활동 방안 등은 스티코프에게 직보했고 스티코프는 이를 25군정치사령부에 재하달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일성 정권은 스티코프선에서 구상됐고 25군사령부가 스티코프의 구상을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실현시켰으며 나와 강미하일 소좌팀이 도와 탄생시켰다고 해도 무리는 없을 겁니다.』
김일성의 입북시기가 가까워진 그해 9월 중순쯤 레베데프는 스티코프로부터 세번째 전통을 받았다. 김일성 입북을 당분간 절대 비밀에 붙이고 초창기에는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당원을 정면에 내세우지 말고 민족진영의 지도자 조만식을 앞세워 소비에트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김일성을 정치적으로 부상시킬 수 있는 방안을 세우라는 것 등이었다.
레베데프 장군의 회고 계속.
『소극동군 최고지도부가 김일성을 장차 조선의 군부 책임자로 내정하고 평양에 들여보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입니다. 군부책임자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실질적인 최고지도자가 되는 과정이지요.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군부내의 구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김두과봉·최창익·박일우·무정·김책·박헌영·허헌·김원봉·허가이·박창옥·조만식등 최고지도자가 될 수 있는 인재가 많았습니다. 군부와 모스크바의 중앙당에서는 특히 인민들로부터 대대적인 추앙을 받는 민족지도자 조만식에 대한 비중이 컸습니다. 신탁통치문제가 나오기 전까지 군부내 최고지도부로부터 조만식을 절대 포기하지 말고 설득해 끌어들이라는 지시가 계속 떨어졌습니다. 이는 소련이 동구의 소비예트화 정권창출때 한시적으로 토착민족주의자들을 잘 활용했던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고집쟁이영감」조만식이 만약 우리의 설득을 받아들였다면 그를 장관을 시키겠습니까. 아니면 당간부를 시키겠습니까. 한시적이거나 상징적이지만 최고지도자(대통령 또는 수상)를 시킬 수 밖에 없지 않습니까.
○두 원수와도 협의
김일성은 소련군부가 내정한 주요 지도자였을뿐 스탈린 대원수의 최종 지명이 떨어진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군정지도부는 박헌영에 대해 처음부터 견해를 달리했지만 외무성(전서울주재 부영사 샤브신을 지칭)과 정보기관(평양주재 소군정 정치고문 발라사노프를 지칭)에서는 박헌영을 최고지도자 후보로 꼽고 지원했으며 국내 공산계열,또는 중국에서 들어온 연안파계열,그리고 민족계열 등이 건재했었기 때문에 곳곳에 변수가 산재해 있었습니다. 물론 김일성을 낙점한 극동군최고지도부의 구상을 결정적으로 뒤엎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만….』
레베데프 장군은 『군부대가 김일성을 북조선의 주요지도자로 내정한 것은 스티코프단독으로 결정한 것이 아니고 그의 직계 상관인 극동군총사령관 A M 바시리예프스키원수와 극동군 제1전선군사령관 K A 메레츠코프 원수 등과 협의해 결정된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처음으로 증언했다.
레베데프 장군의 따르면 스티코프장군은 1942년 소독전쟁때 메레츠코프 원수가 사령관으로 있는 소련군 제7군 군사정치위원으로 파견돼 메레츠코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특히 스티코프는 이 전쟁때 레닌그라드를 마지막까지 사수했고,핀란드에 친소정권을 세울때 혁혁한 공을 세워 모스크바 중앙당으로부터 「탁월한 정치군인」으로 평가 받았으며 그후 메레츠코프를 따라 극동군에 파견됐었다.
□특별취재반
북한부
김국후 차장
안희창 기자
유영구 기자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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