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도전 정신에 용기 얻었단 말에 보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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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선택과 패션’에 관한 본지 연재를 끝낸 노라노씨가 못 다한 이야기를 털어 놓고 있다. 박종근 기자

지난해 12월 7일부터 올해 3월 27일까지 88회에 걸쳐 본지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나의 선택, 나의 패션'을 연재한 패션 디자이너 노라노(79.본명 노명자)씨. 1956년 국내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고 80년 대에는 국산 실크 소재의 옷으로 패션의 본거지인 미국 뉴욕에 진출해 대성공을 거둔 한국인 디자이너다. 시리즈를 끝낸 노라노씨를 26일 오전 서울 청담동 노라노 의상실에서 만났다. 시원섭섭하다는 표정의 노씨로부터 못다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언제부터 준비했나.

"중국 작가 장청의 자서전 '와일드 스완:중국의 세 딸들'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의 할머니와 어머니, 자신에 이르는 3대 이야기다. 그의 이야기는 단순한 자서전이 아니라 중국의 근현대 역사였다. 내가 미국에 진출해 디자이너로 성공하면서 친척들, 조카들, 또 그의 자손들이 미국에 뿌리내렸다. 이들이 자신의 근본을 잊지 않고 한국을 항상 생각할 수 있도록 장청의 자서전 같은 책을 남기고 싶었다. 10년 전부터 메모를 했고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6~7년 전부터다. 매일 한두 시간씩 정리했다."

-독자 반응이 뜨거웠다.

"나이 팔십에 이런 인기를 얻게 돼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웃음). 특히 이 시대 젊은 여성들이 나의 도전 정신에 감명을 받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해줘 더욱 기쁘다. 1950~70년대 은막(銀幕) 스타인 최은희.문희.엄앵란.최지희.김혜정.이빈화.이향자씨와의 1월 30일 만남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우리 사회 원로의 존재 의미를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성공이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는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다.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유복한 집안에서 제대로 교육도 받고 그 옛날에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런데 남들보다 조금 더 잘한다고 해서 그것을 크게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은 아름답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주변의 아주 가까운 지인들까지 이번에 연재된 내 글을 보고 '그런 일도 있었느냐'고 물어올 만큼 나는 내 이야기를 최대한 아끼면서 살았다."

-디자이너이지만 전문 경영인처럼 마케팅 전략도 탁월했던 것 같았다.

"미국 브라운대학에서 강연할 때 디자이너 지망생들에게 'MBA와 결혼하라'고 했는데 농담이 아니었다. 요즘 디자이너들에겐 훨씬 좋은 환경이 갖춰져 있다. 나만 해도 모든 걸 혼자 다해야했다. 디자인은 물론이고 마케팅, 생산관리에서 포장까지 모든 작업을 내가 알고 진두지휘 해야만 했었다. 최근엔 이런 역할이 세분화돼 있어 전보다는 훨씬 일하기 쉬워졌다."

-70~80년대 미국 수출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이유가 궁금한데.

"당시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실크의 양은 세계 최대였다. 이탈리아 실크가 최고로 대접받았지만 우리 소재의 품질도 이에 못지 않았다. 우리나라 실크의 원가 경쟁력에다 유행을 선도하는 나의 디자인이 뉴욕 바이어들에게 먹혀들었던 것이다. 한해 30만 벌이 넘는 옷을 수출해 10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린 적도 있었다."

-어려운 점도 많았을 것 같다.

"중국이 내 디자인을 모방하고 더 싼 실크 원단을 사용하면서 추격해 왔다. 국내에 프린트 공장을 짓는 등 전략을 바꿨다. 중국이 나의 디자인은 따라 올 수 없다는 생각에서 소재를 특화한 것이다. 단순한 실크가 아니라 국내에 염색 공장을 지어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프린트를 만들었다. 미로와 마티스 같은 명화를 프린트하는 식이다. 88올림픽 이후 국내 생산으로는 원가 경쟁이 되지 않아 중국으로 공장을 옮기며 사업을 확장했다.

-젊은 세대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많을 것 같다.

"늘 남들보다 먼저, 디자인과 마케팅 트렌드를 읽으면서 앞서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 나는 이것을 따로 배우고 공부했다기 보다 그래야만 내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때 그때 새로운 생각을 해냈던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나 만의 무엇이 있어야 한다. 단순히 옷만 잘 만들어서 되는 것은 아니다. '내 실력으로 어느 분야에서 누구에게 무엇을 팔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마케팅이고 디자이너도 이것을 알아야 성공할 수 있다."

강승민 기자 <quoique@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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