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비 무엇을 남겼나/말하고 생각할 자유를 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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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개혁·개방정책으로 신사고 도입/경제개혁 실패로 권력기반 붕괴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이 마침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독립국가공동체의 창설과 함께 그는 말 그대로 앉은 자리에서 대통령직을 박탈당했다.
연방최고회의를 열어 소연방을 합법적으로 해체하고 따라서 명예롭게 대통령직을 떠날 수 있게 해달라는 그의 마지막 요구조차 끝내 외면될 것 같다.
권좌를 물러나는 그의 뒷모습이 초라하다.
85년 3월11일 최연소 정치국원으로 제8대 소련공산당 서기장에 오르던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당당했다.
그로부터 6년9개월.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소련뿐만 아니라 세계를 뒤흔들었다.
그가 권좌에 오르면서 소련 국민들은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자유를 돌려받았다.
안드레이 사하로프박사등 반체제인사들이 유형에서 풀려났고 스탈린독재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89년에는 사상최초로 복수정당후보를 상대로한 선거가 치러졌다.
90년 2월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일당독재를 포기했고 고르바초프는 헌법을 개정,대통령에 취임했다.
서구 민주주의 개념을 도입,당과 정부의 국가경영이 대중의 수요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하겠다는 생각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이같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글라스노스트(개방)가 국제정치에는 기적을 가져다 주었다.
85년 11월 제네바에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을 처음 만나면서 그의 신사고 외교는 꽃피기 시작했다.
핵의 시대에 서로를 모두 파멸시키는 핵전쟁을 가정한 외교는 현실성이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고르바초프의 신사고외교는 이후 87년 중거리핵전력폐기협정(CNF),91년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유럽배치 재래식무기감축협정(CFE) 등 사상 유례없는 군축합의를 이끌어냈다.
88년 소련군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같은해 3월 『누구도 진리를 독점,남에게 그것을 강요할 수 없다』는 그의 신베오그라드 선언은 동유럽의 민주화를 출범시켰다.
신베오그라드선언은 동유럽이 스스로의 선택으로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개혁에는 한계가 있었다.
90년 여름 5백일안에 시장경제를 도입하자는 이른바 「샤탈린계획」의 수용을 거부하면서 그의 권력기반은 급격히 무너져 갔다.
특히 그가 주도한 역사재평가 작업,스탈린 비판이 급기야 90년초 발트해 3국의 독립선언을 불러왔고 각 공화국의 민족주의를 자극했다.
연방해체의 불안을 느낀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발트해 3국의 독립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보수파에 기댔고 이는 개혁파가 그를 결정적으로 외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90년 12월 그의 측근 에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등이 독재출현과 쿠데타를 경고하며 사임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국민속에 불러일으킨 비판정신이 그자신을 겨냥하게 된셈이다.
마침내 지난 8월 보수파의 쿠데타가 발생했고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이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빠를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시작한 개혁·개방·신사고외교가 인류사에 가져다준 업적은 오늘의 초라함을 안쓰럽게 바라봐주는데 인색하지 않게한다.<이재학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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