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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선개헌때 당한 JP도 힘못써|김치열차장등 중정 3K가 핵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당시 권력자중 유신작업 울타리 밖으로 철저하게 밀려났던 사람이 또하나 있다.
다름아닌 김종필국무총리였다. 순전히 후계문제로만 보자면 JP는 유신피해자라고 보는 사람도 적지않다. 유신이 없었더라면 75년 그는 공화당후보로 김대중씨나 김영삼씨와 한판 붙었을 가능성이 많았을게다.
박대통령은 69년 3선개헌때 JP를 달래기 위해『다음은 임자차례야』라고 속삭였다고 한다.
72년10월 JP는 노련한 처삼촌에게 두번째 패배를 당하고만 셈이다. JP는 유신을 언제 알았을까.

<궁정동 안가서 작업>
JP측근 K씨(육사8기출신)는『JP로부터 전해들었다』며 이렇게 증언했다.
『비상계엄이 선포되기 4∼5개월전쯤이었다고해요. 박대통령이 JP에게 어느 토요일오후 전화를 걸어 골프치러 가자고 했다는 거죠.
골프장으로 가는 차속에서 박대통령은 이랬다는 겁니다.「임자도 지난해 선거치를때 봤지.
도대체 그런 선거가 어디있어. 다시한번 그런 식으로 대통령뽑다가는 우리나라가 망할 거야」라고요.
무슨 얘긴가 싶어 JP가 의아해하자 박대통령은 본론을 꺼내더래요. 「또 안보도 걱정이야.
남북대화를 하긴 하지만 김일성이를 믿을 수도 없고…. 이러다 저들이 쳐내려오면 걱정인데 말이야. 70년대는 간단치가 않아」라고요.
박대통령은 그러면서 「그래서 임자, 내가 좀 획기적인 생각을 하고있어. 국력을 한군데로 모으자면 체제정비가 불가피할 것 같아. 물론 반대가 많겠지. 야당이나 학생들이 가만히 있겠나. 그래도 나중에 가면 용단이었다는 얘기를 들을수 있을거야. 지금 구상단계에 있는데 내가 나중에 자세히 얘기해줄게. 그때 가면 임자도 좋은 아이디어 좀 내줘」라고 말을 맺었다는 거죠. 그게 전부였어요.』
JP가 내부적으로 유신에 저항했다는 기록이나 흔적은 지금까지 드러난게 없다. JP세력은 3선개헌때 이미 기가 꺾였었다. 72년 유신으로 내리달리던 청와대·정보부를 향해『잠깐만』이라고 소리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도 그때 총리였던 덕분(?)에 그는 지금「유신본당」이란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
유신안개는 총리실·경호실 뿐만아니라 작업본산 남산의 상층부마저도 짙게 덮고 있었던 것같다. 한가락한다는 국장급간부들도 실제 참여자외에는 각방사이에 드리워진 「차단의 커튼」(정보부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쓴다)으로 아무 소리도 들을수 없었던 모양이다.
HR지시에 따라 정보부에서 풍년사업(유신헌법작업암호명)에 핵심적으로 손을 댔던 사람은 3K라고 한다. 검사출신 김치열차장과 K차장보·K부국장이다.
김차장은 43년 고문사법료에 합격해 45년부터 검사생활을 시작, 58년 서울지검장까지 지냈던 검찰엘리트출신이다. 그는 중정차장으로 유신작업에 몸담은후 검찰총장(73년)·내무(75∼78년)·법무(78∼79년) 장관을 거치게 된다. 유신정권의 대표적인 방패였던 셈이다.
김씨 (71·현제일생명보험고문)는 김정렴·이후낙씨 못지않은 유신소신논자다.
『박대통령을 모셨고 그로부터 혜택을 받았다고 해서가 아니예요. 나는 내 소신에 따라 유신을 잘했다고 믿습니다.

<아직도 유신은 소신>
71년, 72년 그때는 자유·민주·평등이라는 형이상학적 단어를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유신은 부국강병책이었어요. 사람들은 입장에 따라 박대통령을 욕할지 모르지만 그는 누가 뭐래도 탁월한 경륜가였어요.
일단 유신을 하자고한 이상긴급조치위반을 다스리는건 불가피했어요. 다만 유신정권에서 고문이나 조작이 있었다면 그점은 역사에 용서를 빌어야지요.』 3K를 빼고 국장급간부중에서 유신냄새를 맡았던 이는 두세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정보부장특보였던 전재구씨(9대유정회의원역임)는 육사8기출신으로 61년 정보부 창설때부터 3, 5, 6국장을 거친 핵심인데도 유신을 몰랐다고한다. 더군다나 그는 71년 대선때 선거주무국장으로 HR를 통해 박대통령에게『이번이 마지막 출마라는 선언을 해야한다』는 건의를 관철시켰던 인물이라는데도 말이다.
전씨의 증언.
『HR방이 있던 정부종합청사안에 나도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신이 워낙 비밀이었고 실무작업도 궁정동안가에서 벌어졌던터라 나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어요.
원래 업무성격상 차단도 차단이지만 뭐랄까 견제같은 것도 있는거고요. 그곳에도 미묘한 권력게임 비슷한게 있을 수 있으니까요.
나는 10·17「비상계엄 선포후에야 11·21개헌국민투표에 대비해 여러가지 유신정책을 만드는 일에 참여했습니다.』
그때 국내문제를 담당하고있던 Z국장조차도 유신을 알 수 없었다고한다. Z는 민간인출신으로 정보부에서 뼈가 굵었다. 그는 이른바「차단의 원칙」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나라 정보부뿐만 아니라 미CIA·소련KGB·이스라엘 모사드등 모든 정보기관엔 불문율이 있어요. 「다른 방에서 하는 일은 알려고도 하지말고 알아도 모른척 하라」는 거죠.
괜스레 더 좀 알겠다고 움직였다가는 다치는 경우가 많아요.
유신은 차단의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던 대표적인 경우예요. 73년8월 김대중납치사건도 그렇고요. 어렴풋이 뭔가일이 벌어지고 있구나라는 눈치는 챘지만 그 내용은 알 수없었지요.
비상계엄이 떨어진 후에야 나한테도 업무가 하달됐어요.』 그는 그가 겨우 맡을수 있었던「냄새」를 귀뜀했다.
『70년12월 HR가 주일대사에서 돌아와 김계원씨 후임으로 정보부를 맡았을때 제1의 당면과제는 71년4월 7대 대선이었어요. 그래서 거기에 전력을 쏟았죠.

<김일성통 찾아나서>
대선을 무난히 넘기고나자 HR는 북한정세분석에 정력을 쏟더군요. 북한담당간부에게「북한권력구조와 대화가능성을 철저히 탐색하라」고 지시하더라고요. HR는 거의 매주 브리핑 받는 것 같았어요. 여러 문제가 있었지만 김일성과 통하는 실세인물을 찾는데 초점을 맞추더군요.
그래서 그 핵심과 채널을 뚫은게 평양밀행이고 7·4남북공동 성명이었어요. 나는 그때뭔가 체제변혁쪽으로 가고있다는 느낌을 받았지요.』
권부를 둘러싸고 있는 안개속에서 유신작업은 10·17을 향해 움직여갔다. 그리고 20년이된 지금까지 찬반토론이 뜨겁고 세인이 궁금해하는 대목을 몇군데 남겨놓았다.<김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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