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야의 도덕성」 치명적 타격/「유서」 공방 1심 판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물증보다 심증에 큰 비중/피고인측 반발 논란소지/국과수 감정결과 모두 인정 주목/사건후 강씨 행적도 결정적 증거/무죄입증 새사실 없는한 뒤집기는 어려울 듯
20일 전민련 총무부장 강기훈 피고인에게 자살방조 부분에도 유죄를 인정,징역 3년이 선고됨으로써 그동안 검찰과 변호인간에 유·무죄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여왔던 유서대필 공방은 결국 검찰의 승리로 일단락됐다.
이날 판결은 강피고인이 5월8일 서강대에서 분신자살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대신 써줘 자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음을 사법적으로 확인한 셈이다.
물론 상급심이 남아있지만 무죄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증거가 새로 드러나지 않는한 선고내용이 달라지기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공권력의 권위와 재야의 도덕성이 첨예하게 대립돼왔던 이 사건의 성격상 재야는 순수성과 도덕성에 다소 흠집을 남기게 됐으나 재야측은 재판결과에 승복하지 않고 있어 국민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관심거리다.
재판부는 ▲김씨 유서가 대필됐는지 ▲대필이라면 강피고인이 썼는지 ▲강씨가 대필했다면 자살방조죄에 해당되는지등 이사건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핵심적인 공소사실에 대해 변호인측 항변은 배척하고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여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이 판결은 특히 증거능력을 둘러싸고 검찰과 변호인측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에 대해 재판부가 증거능력을 모두 인정했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이는 곧 국과수의 공신력을 인정한 것으로 전민련이 숨진 김씨 것이라며 검찰에 제출한 수첩은 절취선이 원본과 겹쳐져 불일치하고,이 필적 역시 강피고인의 것이라는 감정결과를 그대로 수용했다.
국과수 감정요원 4명의 의견이 일치하는데다 감정과정에 외부압력 증거가 없으며 필체의 특징 비교 등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김씨의 여자친구 홍모양(25)의 증언과 김씨 분신을 전후한 강피고인의 행적 등도 유서대필로 결론짓는 정황증거로 삼았다.
홍양 진술 가운데 ▲김씨분신전날 강피고인에게 전화했을때 반응으로 보아 이미 분신계획을 알고 있다고 믿은점,검찰수사에 대비해 여러차례 만나면서 김씨 수첩을 숨기기로 했다는 점 등이 유서대필을 숨기기 위한 행위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또 강피고인이 ▲검찰조사때 전민련 업무일지를 한번도 본적이 없다고 진술하다가 번복한 점 ▲분신직후 홍양에 대한 수사를 미리 알았으면서도 언론 보도로 뒤늦게 알았다고 말을 바꾼 점 ▲명동성당에서 한달이상씩 농성한 점 등도 유서대필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로 삼았다.
재판부는 유서대필의 자살방조 해당 여부에 대해서도 고심했으나 타인의 자살행위에 관여하는 일체의 행위를 포함한다는 학설을 취해 유죄판단을 내렸다.
즉 『자살방조 행위는 이미 자살을 결의한 사람의 실행행위를 용이하게 하는 것으로 수단·방법에 제한이 없고 명시적인가 묵시적인가를 따질 필요가 없으며 정신적·무형적 방조도 인정된다』고 포괄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재판부는 변호인측이 강피고인의 공소사실중 범행일시와 장소가 특정되지 않아 공소기각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라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반 재판에서는 증거를 배척할 경우 그 이유는 밝히지 않는게 보통이나 이날 재판부는 사건의 중대성을 감안,이례적으로 변호인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를 낱낱이 설명한 것이 특징.
일본인 오니시 요시오씨(73)의 필적감정은 한글에 대한 인식이 없는데다 감정방법과 내용에 허술한 점이 많아 증거로서의 신빙성이 없다고 재판부는 밝혔다.
이제 강피고인에 대한 1차적인 법률평가는 내려졌으나 사건의 성격으로 보아 유서대필 시비는 완전히 가라앉기 힘들 것으로 보이며 재야운동권의 일부 반발도 예상된다.
특히 재판부가 「1백% 진실을 모르겠으나 국과수감정 결과 나온 이상 이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소극적인 자세로 물증보다는 심증에 치우쳐 판단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실체적 진실」을 가리기 위한 공방이 상급심에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김석기기자>
◎판결문 요지/“정신적 무형적 방법의한 자살방조 명백/일인 감정은 자료 공정성결여 인정 못해”
◇변호인의 법률적 주장에 대한 판단=변호인은 이미 자살을 결심하고 있는 사람에게 유서를 대필하여 준 것만으로 피고인이 위 김기설을 방조하여 자살하게 하였다고 할 수 없다 할 것이므로 공소기각의 선고를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을 방조하여 자살하게 한다는 것은 이미 자살의 결의를 가지고 있는 자에게 그 자살행위를 도와주어 자살의 결행을 용이하게 한다는 의미로 이에는 적극적 수단에 의한 것,소극적 수단에 의한 것,유형적·무형적 방법에 의한 것이 모두 포함된다 할 것이므로 유서를 자살을 결심한 자에 주었다면 정신적·무형적 방법에 의하여 자살하려는 자의 자살수행을 용이하게 하였다고 할 것이므로 위 공소기각 결정의 주장은 이유없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작성의 감정서의 신뢰성=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은 감정을 맡은 문서감정 실장 김형영이 1977년 3월경 위 과학수사연구소의 문서감정 요원으로 공채된 이래 1980년도의 2년 3개월을 제외하고는 계속하여 문서감정 업무에 종사하여 왔고 그동안 처리한 문서 감정건수는 수만건에 달하였으나 그 감정결과가 잘못된 것으로 판정된 것이 한건도 없었으며 동인의 오랜경험과 연구를 통하여 획득한 전문지식을 동원하여 한글 필적감정 방법과 기준을 정리하고 동인이 만든 감정방법과 기준이 현재 국내에서 한국필적감정의 지침으로 되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동인을 한글 필적감정의 최고 권위자라 볼 수 있고 또한 신뢰할 수 있는 감정인으로 평가할 수 있는 점과 동양에서는 우리나라만이 갖고 있는 최첨단의 정밀기구인 고정밀비교확대 투영기를 사용하여 도출된 감정결과를 다른 세사람의 감정인들과 공동으로 현미경 등을 통하여 관찰,토의한 끝에 감정인 4인의 의견이 일치되어 감정결과를 회보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에 비추어볼때 이사건 필적감정이 세심하고 신중한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고 보여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은 공정하고 정당하게 이루어진 것이고 신뢰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봄이 상당하다.
◇여자친구 홍양 진술의 신빙성=변호인들은 홍양이 장시간에 걸쳐 조사를 받은 끝에 김기설과 피고인에 대한 배신감으로 인하여 의혹과 혼돈속에서 진술한 것이므로 그 진술은 사실과 다르고,1차 진술이 사실에 맞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홍양이 2차진술시 1차로 조사 받을때 거짓 진술하였던 경위,김기설의 이름 등을 써주었을때 느꼈던 심경 등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을뿐 아니라 그것을 써 주었다는 날로부터 불과 1주일후에 2차 조사를 받으면서 1주일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고 잘못 진술하였다고는 보여지지 않으며 다만 그후 피고인과의 대질 신문시나 피고인과 그 가족들이 있는 법정에서는 피고인이나 그 애인인 이모양에 대한 의리상 거짓진술을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심이 강하게 들어 번복한 진술을 믿기 어렵고 결국 검찰2회 진술이나 공판기일전 증인신문시의 진술이 사실에 부합하는 진술이라고 판단된다.
◇일본인 오니시의 필적감정에 대하여=위 필적감정결과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와 상반된 내용인 바,위 오니시의 이 법정에서의 진술과 동인작성의 감정서의 기재 및 이 사건 공판과정에서 나타난 자료들을 종합하면 위 오니시의 감정결과는 ①한글을 전혀 모르는 관계로 한글감정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지식과 경험이 있는지,특히 공정한 자료를 제공하였는지 의심스럽고 ②동인은 김기설의 필적인지의 여부에 관하여 논란이 있는 수첩,숭의여전 메모,방명록노트 등에 대하여 그것들이 김기설의 필적임에 다름이 없다는 전제하에 감정을 하였다고 하고,
③이 사건 감정의 중심 대상인 유서 등에 관하여 사본을 감정자료로 삼아 감정함으로써 필기구의 종류나 복사기의 성능·상태에 따른 필적의 미세한 특징 및 필압 등을 검토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필기구의 종류를 잘못 판단하고 필적의 방향을 오인하였다고 진술하고 있는점 등을 고려할때 동인의 감정결과에 비추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감정결과를 배척할 수는 없다고 할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