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언론에 더 친절한 북측/신성식 사회부기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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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5차 서울남북고위급회담에 대한 기대는 자못 크다. 꼭 1년만에 서울에서 남북회담이 다시 열리기 때문이 아니라 이번엔 무슨 합의든 성과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이런 기대때문에 양측 총리의 기조연설내용은 비상한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남북대화때마다 마감시간에 쫓기는 남쪽기자들은 북의 연설문을 미리 입수하느라 고역을 치른다. 이들은 이미 정해진 기조 연설문을 움켜쥐고는 좀처럼 내놓지 않고 애를 태우게 만든다. 그래서 때론 연설문내용이 뭔지 취재하느라 주된 정보소스인 북측기자들에게 필요이상으로 「웃는 얼굴」을 보여야하는 일도 없지 않다.
5차회담의 첫날회의를 앞둔 11일 오전도 예외는 아니었다.
회의는 10시에 시작되는데 정원식 총리의 기조연설문은 곧 배포됐다.
이제 마감시간까지 북쪽 연총리 기조연설문도 함께 보도해야 할 판인데 북측은 내놓을 생각을 않고 있다. 보안유지 때문이겠지만 너무 늦어지면 북측 연설은 기사화되지 못할 수도 있다.
남측기자들은 여기저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이런 와중에서 북측은 일본기자들에게는 오전 9시30분에 연설전문 1부를 미리 내주었다.
일본기자들은 또 그들대로 「어느 한 회사가 먼저 연설문을 구하면 모든 회사가 이를 같이 사용한다」는 내부원칙을 미리 정했다고 한다.
이들은 40여페이지로 된 연설문을 일본취재기자단 숫자대로 20여부를 1시간동안 여유있게 복사하고 비슷한 시각에 송고를 시작했다.
북측이 일본기자들에게만 연설원고를 사전에 돌린 것은 결과만 본다면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다. 그들은 외신이고 또 동시송고 하기로 내부 담합까지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남측을 따돌리고 일본기자들에게만 먼저 슬쩍 자료를 준 북측의 처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떳떳하지 못한 것 같다.
남북문제 해결의 첫 바탕이 상호신뢰라는 점을 보다 명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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